작성일 : 2022.10.21 11:30 수정일 : 2022.10.21 11:32
작성자 : 배상복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나도 모르게 사용하는 영어식 표현
우리말에는 오래도록 이어져온 고유한 표현 방식이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영어를 배우면서 익숙해진 표현이 우리식 표현 대신 쓰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즉 영어를 직역한 듯한 표현이 남용되는 사례가 많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피동형 문장이다. ‘가지다(갖다)’ 형태의 남용도 영어식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또한 과거완료나 ‘~중이다’를 남용하는 것도 영어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선 피동형 쓰면 자신감 없어 보여
영어에서는 무생물을 주어로 쓰는 데 익숙해 있다. 동사의 유형을 바꿈으로써 능동문과 피동문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는 피동형을 쓰면 문장이 어색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행위의 주체가 잘 드러나지 않아 뜻이 모호해지고 전체적으로 글의 힘이 떨어진다.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한 체계적인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는 문장을 보자. ‘정책’이 주어이고 피동인 ‘수립되어야 한다’가 서술어인 피동문으로 주장의 힘이 떨어진다. 능동문인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로 하는 것이 훨씬 힘이 있다.
“인간에 의해 초래된 생태계의 인위적 변화로 자연계에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있다”를 보면 얼마나 영어식 표현에 익숙해 있는지 여실히 볼 수 있다. ‘~에 의해 ~된’은 영어식 관용구(be동사+과거분사+by~)를 그대로 옮긴 듯한 표현이다. 이런 경우 ‘~에 의해’를 쓰면 피동이 될 수밖에 없다.
‘have’를 그대로 번역한 듯한 ‘가지다(갖다)’
스웨덴 그룹인 아바(ABBA)의 노래 가운데 “I have a dream”이 있다. 이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 또는 ‘나는 꿈을 갖고 있다’로 옮기기 십상이다. 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have’를 ‘가지다’ 또는 그 준말인 ‘갖다’로 단순 번역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 우리말에서는 ‘있다’고 말하지 ‘가졌다’고 하지 않는다. 사물을 소유로 바라보기보다 존재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꿈을 가지고 있다”가 아니라 “나에겐 꿈이 있다” “내게는 꿈이 있다” 등으로 하는 것이 우리식 표현이다.
“나는 세 명의 가족을 가지고 있다” “좋은 생각을 가진 사람은 말해 보라”도 영어의 ‘have’를 그대로 번역한 투다. “나에겐 세 명의 가족이 있다” “좋은 생각이 있는 사람은 말해 보라” 등으로 표현해야 한다.
카톡 등 문자 메시지에서 자주 사용하는 “좋은 시간 가지시기 바랍니다” 또는 “즐거운 시간 가지시기 바랍니다”는 “Have a good time”을 그대로 번역한 투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나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가 우리식 표현으로 더욱 자연스럽다.
우리말에선 과거완료 '-었었-' 대부분 불필요
우리말은 원래 시제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다고 한다. 굳이 구분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각각의 진행형이 있으며 드물게 ‘-었었-’ 형태를 쓴다. ‘가다’를 예로 들면 ‘갔다-간다-가겠다’ ‘가고 있었다-가고 있다-가고 있겠다’가 주된 표현 방식이다. 그러나 영어식 과거완료 표현이 우리말에 파고 들어 남용되면서 어색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10년 전 결혼했었지만 5년 전 이혼했다”처럼 과거보다 이전 상황을 나타낼 때 영어식 과거완료 형태인 ‘-었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우리말에서는 이때도 “10년 전 결혼했지만 5년 전 이혼했다”로 표현하는 것이 정상이다. ‘10년 전’이 그 이전 상황을 나타내 주므로 과거완료 표현이 필요가 없다.
“한때는 가출도 했었지만 점차 마음을 잡았고 지금은 성실하게 살고 있다”는 과거완료-과거-현재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영어식 표현이다. 이것은 합리적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말의 고유한 표현 방식이 아니다. “한때는 가출도 했지만 점차 마음을 잡고 지금은 성실하게 살고 있다”로 해야 우리말 어법에 맞다.
‘~ing’를 그대로 옮긴 듯한 ‘~중이다’ 남용
요즘 ‘~중이다’ 표현이 너무 많이 쓰이고 있다. 이것은 영어의 ‘~ing’를 공부하면서 무턱대고 ‘~중이다’로 암기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라 보는 견해가 있다. “공격적인 투자를 계획 중이다” “행사 참가를 고려 중이다” “정확한 사고경위를 조사 중이다” 등이 이런 예다.
우리말의 ‘~중’은 ‘수업 중, 공부 중’처럼 ‘~하는 동안’, ‘임신 중, 수감 중’처럼 ‘어떤 상태에 있는 동안’ 등의 뜻으로 쓰일 때 잘 어울리는 말이다. 물론 이런 의미에서 “수업 중이다” “공부 중이다” “식사 중이다” 등의 표현이 가능하기는 하다. 하지만 이런 경우를 제외하면 보통은 ‘~하고 있다’가 적절하다. ‘계획 중이다→계획하고 있다’ ‘고려 중이다→고려하고 있다’ 등이 정상적인 우리말 표현 방식이다.
‘~중이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계획 중이다”→) “계획하는 중이다” “계획하고 있는 중이다” 등처럼 영어의 진행형을 더욱 흉내 낸 듯한 표현도 많이 쓰이고 있다. 모두 “계획하고 있다”가 정상적인 말이다. “원인을 파악 중에 있다”와 같이 ‘~중에 있다’는 어설픈 표현도 흔히 사용된다. “원인을 파악하고 있다”가 적절한 말이다.
복수에 꼬박꼬박 '~들'을 붙이는 건 영어식
사물을 복수로 만들 때 쓰이는 접미사 ‘~들’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말에서는 이야기 앞뒤의 흐름으로 복수임을 짐작할 수 있거나, 문장 속에 있는 다른 어휘로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경우 ‘들’을 붙이지 않는다. 복수에 꼬박꼬박 ‘들’을 붙여 쓰는 것은 영어식 표현이다.
“먹자골목에는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를 예로 들면 ‘늘어서 있다’는 서술어로 복수라는 것을 알 수 있으므로 ‘음식점’에 ‘들’을 붙일 필요가 없다. “먹자골목에는 음식점이 늘어서 있다”라는 표현으로 충분하다. 불필요하게 ‘들’을 사용하면 ‘들’이 군더더기로 작용함으로써 문장의 간결성이 떨어지고, 읽기에도 불편해지므로 절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생님들과 함께 수련 활동을 떠난 이들 학생들은 부모님들의 고마움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들을 보냈다”에서 보듯 ‘들’이 많으면 문장이 너저분해진다. “선생님과 함께 수련 활동을 떠난 이들 학생은 부모님의 고마움을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가 훨씬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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