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10.12 15:00
작성자 : 배상복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한글·우리말의 세계적 인기에도 불구
우리 스스로는 외래어 남용하는 경향
오는 9일은 제576회 한글날이다. 세종대왕은 요즘 한글·우리말과 관련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걱정하고 계실까? 아마도 최근 들어 한류의 영향을 타고 세계 각국에서 한글과 우리말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을 기뻐하고 계시리라 생각된다. K-팝을 비롯해 K-문화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면서 한글과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분 좋은 소식과는 달리 우리 스스로는 우리말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외래어 남용이다. 우리말로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도 세종대왕은 이 점을 걱정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다. 정책용어나 공공용어로 남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외래어를 모아 봤다.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거버넌스’
근래 들어 부쩍 많이 듣는 용어가 ‘거버넌스’다. ‘민관 거버넌스, 다문화 거버넌스, 에너지 거버넌스, 블록체인 거버넌스, 인공지능 거버넌스’ 등 공공언어에서 ‘거버넌스’란 말이 여기저기 쓰이고 있다. ‘거버넌스’가 마구 쓰이다 보니 ‘흙탕물 저감 거버넌스’ ‘주민과 거버넌스 운영’ ‘먹거리 거버넌스’와 같은 다소 억지스러운 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거버넌스(governance)’는 무엇보다 의미가 정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공공언어의 생명은 정확성과 소통성이다. 용어가 정확하면 소통성은 저절로 올라가므로 정확성이 더욱 중요하다. 국립국어원은 ‘거버넌스’를 ‘정책, 행정, 관리, 민관 협력, 협치’ 등으로 문맥에 맞게 적절히 바꾸어 쓸 것을 권하고 있다.
‘이용권’이란 쉬운 말을 두고 쓰이는 ‘바우처’
요즘은 국가나 지자체가 고령자 또는 저소득층을 지원해 주는 제도가 많다. 이런 제도 가운데는 ‘바우처’란 것이 있다. ‘에너지 바우처, 데이터 바우처, 국민행복카드 바우처, 평생교육 바우처, 스포츠 바우처, 급식 바우처’ 등이 있다. ‘기저귀 바우처, 과일 바우처’도 있다.
그러나 ‘바우처’는 너무 어려운 용어다. 이용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원활하게 제도를 이용할 수 있게끔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야 한다. 특히 고령자나 저소득층이 이용하는 제도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바우처’는 무언가 거창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용은 단순하다. ‘이용권’이다. ‘에너지 이용권’처럼 ‘이용권’이라고 하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기초 체력’ 대신 쓰이는 ‘펀더멘털’
주식이나 경제 용어 가운데도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외래어를 쓰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펀더멘털’이다. ‘펀더멘털(fundamental)’은 ‘기초 체력’을 뜻하는 말이다. “경제의 펀더멘털이 떨어졌다” 등처럼 쓰이기 일쑤인데 “경제의 기초 체력이 떨어졌다”고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경제와 관련해서는 ‘어닝 서프라이즈’도 자주 듣는 말이다. ‘어닝 서프라이즈’는 회사가 발표한 실적이 예상을 뛰어넘어 놀랍다는 뜻이다. ‘실적 급등’으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컨센서스’도 있는데 이는 어떤 집단에서 대부분 일치하는 의견을 가리킨다. 국립국어원은 ‘컨센서스’를 ‘의견 일치’ 또는 ‘합의’로 바꿔 쓰도록 권하고 있다. ‘밸류에이션’도 쓰이는데 이는 ‘평가 가치’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목표 설정’에 너나없이 쓰는 ‘로드맵’
요즘은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로드맵’이란 용어를 많이 사용한다. ‘노사관계 선진화 로드맵, 국가기록관리혁신 로드맵, 조직경영 로드맵, 조기유학 로드맵, 성공을 위한 로드맵’ 등 무슨 목표나 일정에 관련된 것은 거의가 로드맵이다.
로드맵(road map)이란 원래 도로 지도를 말한다. 의미가 확장돼 앞으로의 계획이나 전략 등이 담긴 구상도·청사진 등을 뜻하기도 한다. 기업·국가 등이 어떤 일을 계획하거나 추진할 때 사용된다. ‘로드맵’이란 말이 거창하고 세련돼 보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용어나 명칭이 아니라 제대로 된 계획과 실천이다. ‘로드맵’은 상황과 문맥에 따라 ‘방안, 목표, 일정, 청사진’ 등으로 고쳐 쓰면 된다.
코로나19로 전 국민 유행어가 된 ‘팬데믹’
코로나19는 바이러스를 퍼뜨린 것과 더불어 수많은 외래어를 전파하기도 했다. 우선 ‘팬데믹(pandemic)’이 있다. 전염병이 전 세계적으로 크게 유행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보통 제한된 지역 안에서만 발병하는 유행병과는 달리 두 개 대륙 이상의 매우 넓은 지역에 걸쳐 발병한다. ‘팬데믹’을 쉬운 말로 바꾸면 ‘감염병 세계적 유행’이다.
이 밖에도 코로나로 인해 생긴 외래어가 많다. 드라이브 스루(→승차 진료소, 승차 검진), 에피데믹(→감염병 유행), 워킹 스루(→도보 진료), 코호트 격리(→동일 집단 격리), 셧다운(→가동정지), 언택트(→비대면), 온택트(→영상 대면)이 있다. 코로나 블루(→코로나 우울), 위드 코로나(→코로나 일상), 엔(N)차 감염(→연쇄 감염), 트윈데믹(→감염병 동시 유행), 스니즈 가드(→침방울 가림막) 등도 있다.
예약하고 나타나지 않는 ‘노쇼’
최근 들어 부쩍 많이 듣게 되는 용어가 ‘노쇼’다. 코로나19 백신 예약을 해 놓고 당일 접종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노쇼’라 부른다. 얼마 전에는 휴가철을 맞아 관광지 숙박업소나 식당 등을 예약해 놓고 ‘노쇼’를 해서 자영업자들이 울상이란 기사도 나왔다.
‘노쇼(no show)’는 이처럼 예약해 놓고 나타나지 않는 행위 또는 그런 사람을 가리키는 영어다. 국립국어원은 ‘노쇼’를 대신할 우리말로 ‘예약 부도’를 선정한 바 있다. 그러나 ‘부도’란 말이 다소 어렵거나 무겁게 다가온다. 한글문화연대는 ‘예약 부도’의 의미가 잘 와닿지 않는다며 ‘노쇼’의 우리말로 ‘예약 어김’을 제시하기도 했다. 외래어 사용을 줄인다는 측면에서 ‘예약 부도’나 ‘예약 어김’ 어느 것이든 좋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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