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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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의병 열전] 11. 김추옥 의병·김태의 의병장

작성일 : 2022.09.20 18:50 수정일 : 2022.09.20 18:54

작성자 : 조홍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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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강화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많은 애국지사가 순국하거나 투옥되었으나 이에 대한 사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강화 의병들의 공적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잠들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지난해 11월 4일 인천대학교(이사장 최용규)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강화군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제침략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30명을 추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화군은 현재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 30명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 및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강화 의병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의병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강화군에서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인 김추옥 의병과 김태의 의병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김추옥 의병

본적 : 미상
생년월일 : 1880
독립운동 당시 주소 : 경기도 강화군 하도면(下道面) 사기동(沙器洞)

김추옥(金秋玉) 의병은 강화 출신으로 1907년 4월 헤이그특사 이준(李儁) 일행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호종(護從)하고 돌아온 이능권(李能權)이 이준 열사가 자결하고, 광무황제가 퇴위되었다는 소식에 300명에 이르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을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킬 때 여만복(呂萬卜)・유성준(兪成俊)・이호춘(李浩春) 등과 더불어 핵심 참모로 참여하였다. 그는 대동창의단 참모로서 강화군 길상면, 상도면, 등지에서 총기 구입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였고, 1908년 음력 11월 1일 전등사(傳燈寺)에 묻어둔 총기 2정을 주지 송계찬(宋戒燦)이 일본군에 넘긴 죄를 물어 수장(水葬)하는 등의 일을 하다 피체, 원심 재판의 피고인으로 나오지만 판결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하도면 : 현재의 화도면. 옛날에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이었으며, 강화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조선시대 이래로 하도면(下道面)이라고 칭하다가 1937년 하도공립보통학교장으로 부임하여 왔던 일본인 산원(山元)의 제청으로 하도(下道)라는 명칭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하여 화도(華道)로 개칭하였다.

*상도면 : 현재의 양도면. 조선시대 이후 하도면과 마주하면서 옛 진강현의 부치쪽 곧 위쪽에 자리하고 있어 상도면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위량면(位良面)과 합하고 위량면에서 양(良)자와 상도면에서 도(道)자를 따서 양도면이라 칭하였다.

 

김태의 의병장

본적 : 미상
생년월일 : 미상
독립운동 당시 주소 :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김태의(金泰宜) 의병장은 1908년 음력 정월과 2월 경기도 강화군에서 40여 명의 의진을 형성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는데, 의진의 의병 서영백(徐英伯, 2011년 애국장)은 피체되어 그해 9월 29일 경성공소원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이어 상고하였으나 대심원에서 기각되었는데, 이듬해 3월 11일 내각회의에서 종신징역이 확정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처럼 김태의 의병장은 1908년 강화의병장으로 활약한 사실은 의진의 서영백 의병 판결문 속에 나타나지만 그의 구체적인 행적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태의 의진의 의병이었던 서영백 의병 등에 대한 경성공소원 판결문(번역)>

위 내란 피고사건에 대하여 당 법원은 검사 삼촌일로(衫村逸樓)의 입회 후 심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피고 서영백(徐英伯)을 교수형에, 피고 강명선(姜明善)을 징역 15년에, 피고 강대여(姜大汝)를 징역 10년에, 피고 송금종(宋今宗)을 징역 7년에, 피고 양충신(梁忠信), 피고 김치연(金致淵), 피고 이동민(李東民)을 각각 징역 5년에 처한다.

사실 및 이유
제1. 피고 서영백(徐英伯)은 강도를 할 목적으로 융희 2년 음력 정월 그믐날께 폭도 우두머리 김태의(金泰宜)의 부하로 가입하여, 그의 무리 40여 명과 같이 서양총, 구총(舊銃), 군도(軍刀) 등의 병기를 휴대하고 동년 음력 2월 강화군(江華郡) 내의 각 촌락에 난입하여, 동군(東郡) 북면(北面) 강호동(江湖洞) 이(李) 감찰(監察) 집에서 돈 180원을, 함치상(咸致相) 집에서 돈 170원을, 장아동(長阿洞) 홍낙현(洪洛鉉) 집에서 돈 170원을 빼앗은 자이다.

(중략)

(…) 그리고 피고 서영백을 제외하고는 모두 범죄의 정상(情狀)에 참작한 만한 점이 있으므로 동법 제125조에 따라 피고 강명선은 두 등급을, 피고 강대여는 세 등급을, 피고 송금종, 김치연, 이동민은 네 등급을, 양충신은 다섯 등급을 감하여 처단할 것이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융희 2년 9월 29일

훈령 형 제499호

보고서 제483호를 접준(接準)하여 강도 죄인 서영백(徐英伯)을 특별히 본 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다는 뜻으로 다음과 같이 경주(經奏)하였으니 즉각 해당 죄인 서영백에게 임금의 뜻을 포유(布諭)한 후에 집행하는 것이 옳으므로 이에 훈령하니 이에 의하여 시행한다.

융희 3년 3월 24일


▲ 서영백 의병 판결문(경성공소원. 1908.09.29.). <자료=국가기록원>

조홍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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