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8.24 17:22
작성자 : 배상복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일본말이나 일본식 한자어는 일제 잔재
가능하면 우리식 표현으로 바꾸어 써야
우리가 쓰는 언어 가운데는 일본말(또는 일본식 한자어)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일본말인 줄 알면서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일본말인 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쓰는 것도 있다. 대부분 사람이 일본말이라 의심하지 않고 당연히 우리말이겠거니 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대표적으로 ‘무대포’와 ‘단도리’다. 또한 자동차와 관련해서도 무심코 일본어를 쓰기 일쑤다. ‘엥꼬’ ‘만탕’ ‘이빠이’ 등이다. 이러한 일본말이나 일본식 한자어는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아직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아직도 우리말 속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라 할 수 있다.
대포가 없는 ‘무대포’ 정신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선조에게 올린 장계(狀啓)다. 전투에 임하는 비장한 각오를 담고 있다. 그는 고작 열두 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전선을 무찔렀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시피 한 전투였다. 냉정한 현실 인식과 치밀한 전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무조건 하면 된다는 소위 ‘무대포 정신’으로 임했다면 참혹한 패배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당시 승리는 철저한 준비와 강인한 정신력이 바탕이 됐지만 실제로는 화포, 즉 대포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한다. 튼튼한 판옥선에 장착된 조선의 화포가 일본군의 것에 비해 사정거리가 길었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일본 함선을 격파할 수 있었다. 지금도 전쟁에서 대포가 큰 역할을 하지만 무기가 변변치 못했던 당시에는 천자·지자총통 등 우리의 우수한 대포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무기가 대포이다 보니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무대포’를 얘기할 때는 대포가 연상된다. 적을 무찌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인 대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무모하게 상대에게 달려드는 행위가 떠오른다. 그저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돌진하는 것을 ‘무대포 정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 수군을 무시하고 상대적으로 열세인 대포를 가지고 전투를 벌인 일본군이야말로 무지와 만용의 무대포 정신으로 달려든 셈이다.
그러나 무대포 정신이란 말 속의 ‘무대포’는 글자 그대로 ‘대포가 없다’는 우리말과는 거리가 멀다. 무대포의 어원은 일본어 무철포(無鐵砲)다. 여기에서 철포(鐵砲)는 소총 등 총포류를 이르는 말이다. 무철포(無鐵砲)는 일본에서만 쓰이는 일본식 한자어로, 앞뒤 생각 없이 행동하는 모양을 뜻한다. 일본식 발음 무뎃포(むてっぽう)에서 무대포라는 단어가 나온 것으로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은 ‘무데뽀’라는 말을 표제어로 올리고 ‘일의 앞뒤를 잘 헤아려 깊이 생각하는 신중함이 없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 설명해 놓았다. 따라서 사전에 맞게 적으려면 ‘무데뽀’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무데뽀’인지 ‘무대포’인지 표기가 헷갈린다. 대포도 없이 무모하게 달려드는 것을 생각하면 ‘무대포’가 맞을 듯도 해 ‘무대포’로 적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차피 일본식 한자어의 일본식 발음에서 온 단어라면 문맥에 맞게 ‘막무가내’나 ‘무모’라는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대포 정신은 ‘막무가내 정신’이라고 하면 된다.
‘엥꼬’부터 ‘만땅’까지 자동차 관련 일본어
고속도로를 달리거나 먼 길을 갈 때는 차의 연료를 가득 채워야 한다. 연료가 부족하면 갑자기 길이 막히는 경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강원도 등 산간지역에서는 예상치 못한 폭설이 내려 고립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멀리 출발하기 전에는 차량 정비도 필요하지만 항상 기름을 가득 채워 넣는 것이 중요하다.
기름을 가득 넣을 때 주유소 직원에게 “만땅 넣어 주세요” 또는 “이빠이 채워 주세요”라고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기쁨 만땅, 행복 이빠이”처럼 일상에서도 ‘만땅’과 ‘이빠이’란 단어가 많이 쓰인다.
그러나 만땅과 이빠이는 일본말이다. 만땅은 ‘찰 만(滿)’자에 영어의 탱크(tank)를 합성한 일본식 조어다. 일본 발음으론 만탕쿠(まんタンク)인데 줄여 만땅이라 하는 것이다. 이빠이는 일본에서 한자로 일배(一杯)라 적고 잇파이(いっぱい)라 읽는 단어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사용되는 것이다. 만땅과 이빠이 모두 ‘가득’ 또는 ‘가득히’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만땅과 반대로 ‘엔꼬’라는 단어도 사용된다. 엥꼬(えんこ)는 일본에서 자동차 등이 고장 나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기름이 떨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즉 “차가 엔꼬가 났다”고 하면 우리나라에선 차의 기름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쓰면 차가 고장 나 움직이지 못한다는 의미다. 우리말로 쉽게 얘기하면 “차가 퍼졌다”는 말이다.
만땅과 이빠이는 ‘가득’이나 ‘가득히’로 대체할 수 있으므로 주유소에서 “만땅요”, “만땅 넣어 주세요”, “이빠이 채워 주세요”라고 하지 말고 “가득(히) 넣어 주세요”, “가득(히) 채워 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기쁨 만땅, 행복 이빠이’는 ‘기쁨 가득, 행복 충만’이라고 바꿔 쓰면 된다.
자동차와 관련해선 ‘기스’란 단어도 많이 쓰인다. “간밤에 누가 그랬는지 차에 기스가 났다”, “자동차 기스를 복원해 드립니다” 등처럼 사용된다. 한자 상(傷)에 해당하는 일본말이 ‘기스’다. 우리말로는 상처· 흠 · 흠집 · 결점 · 티 등을 뜻한다. “기스가 났다”는 “상처 (흠· 흠집 · 티) 가 났다”고 하면 된다.
‘단도리’ 대신 ‘채비’를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니 긴 옷으로 단도리를 해라”, “요즘 아이들은 빗나가기 쉬우므로 단도리를 잘해야 한다” 등처럼 일상생활에서 단도리가 흔히 쓰이고 있다. “이런 일이 터지기 전에 정부가 제대로 단도리를 하지 않고 무얼 했나” 등과 같이 언론에서도 ‘단도리’란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그러나 단도리(段取り, だんどり)는 일본말이다. 일을 해 나가는 순서·방법·절차 또는 그것을 정하는 일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이 ‘단 도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준비나 채비, 단속 등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일을 잘 단도리해라”와 같이 ‘마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도리’가 들어간 우리말(윗도리· 아랫도리 · 목도리 · 장도리 등) 이 적지 않으므로 ‘단도리’도 대부분 우리말이려니 하며 쓰고 있다.
채비나 단속을 뜻하는 순우리말로는 원래 ‘잡도리’가 있다. “이번에 잡도리를 못하면 더 버릇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처럼 쓰이지만 지금은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고유어인 잡도리가 한자어인 채비나 단속, 일본말인 단도리에 밀려 사라져 가고 있는 셈이다. 잡도리와 비슷한 뜻의 고유어로는 ‘당조짐(정신을 차리도록 단단히 단속하고 조임)’도 있다. “아랫사람을 잘 잡도리해야 한다”처럼 단도리 대신 ‘잡도리’나 ‘당조짐’을 사용하는 버릇을 들이면 좋겠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쓰다 보면 익숙해진다. 문맥에 따라 ‘채비’나 ‘단속’이란 말을 사용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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