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8.16 15:43 수정일 : 2022.08.16 15:59
작성자 : 조홍식
과거 강화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많은 애국지사가 순국하거나 투옥되었으나 이에 대한 사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강화 의병들의 공적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잠들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지난해 11월 4일 인천대학교(이사장 최용규)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강화군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제침략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30명을 추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화군은 현재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 30명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 및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강화 의병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의병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강화군에서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인 궉종석·김귀봉·김기섭·김신명 의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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궉종석 의병 본적 : 미상 궉종석(鴌宗石) 의병은 경기도 경성 출신으로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킨 지홍윤(池弘允)·박계석(朴啓石) 의진(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다. 1908년 음력 7월 대한제국 기병대 부교(副校) 출신 김용기(金龍基, 일명 金鳳基) 의병장이 강화도에 진출하여 지홍윤·박계석을 의진의 중대장으로 삼아 의병투쟁을 전개할 때 김용기 의진의 분대장으로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일본 군경은 물론 일제 밀정(일제강점기 일본 측에 독립운동의 정보를 제공한 사람)과 고총(古塚)을 도굴하던 일본인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궉(鴌)씨는 한국의 성씨다. 본관은 청주(淸州), 선산(善山), 순창(淳昌) 3본이 있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 74가구, 248명으로 조사된 바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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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봉 의병 본적 : 미상 김귀봉(金貴奉) 의병은 경기도 강화 출신으로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을 일으킨 지홍윤(池弘允)·박계석(朴啓石)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투쟁을 벌였다. 궉종석 의병과 마찬가지로 1908년 음력 7월 대한제국 기병대 부교(副校) 출신 김용기(金龍基, 일명 金鳳基) 의병장이 강화도에 진출하여 지홍윤·박계석을 의진의 중대장으로 삼아 의병투쟁을 전개할 때 김용기 의진의 분대장으로 강화도와 인근 도서지방에서 일본 군경은 물론 일제 밀정과 고총(古塚)을 도굴하던 일본인을 처단하는 활동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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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섭 의병 본적 : 미상 김기섭(金基燮) 의병은 경기도 강화군 일대에서 의병투쟁을 하였다. 그는 경기도 양주 출신 군인으로 1907년 8월 군대해산 후 의병을 일으켰던 황재호(黃在浩) 의병장, 강화의병장인 지홍윤(池弘允) 의진의 중대장 박계석(朴啓石)·참모 고부성(高夫城) 등과 함께 강화도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면서 일본 군경 밀정을 하던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송대현, 양사면 산이포(山伊浦)에 살던 일진회장(一進會長) 양학진 등을 처단하기도 하였다. 한편 그에 대한 체포기록이나 판결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일진회 : 일진회(一進會)는 대한제국 시기의 대표적인 친일 단체. 일제에 강제 병탄될 때까지 일제의 군부나 통감부의 배후조종 하에 일본의 침략과 병탄의 앞잡이 행각을 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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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명 의병 본적 : 미상 김신명(金愼明) 의병은 강화출신으로 1907년 8월까지 강화분견대 병정이었다.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지홍윤(池弘允)은 의병을 일으켜서 황해도 배천·평산·해주군, 경기도 인천·교동·강화군 고려산과 서동사 등지에서 활약했는데, 김신명은 1908년 음력 11월부터 지홍윤 의진에 참여하였다. 그 후 김신명 의병은 황해도 평산·연안·배천 등지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 1909년 1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지홍윤 의병장이 부상을 당한 후 의진을 중대장 이천명(李千明)이 이끌게 되자 그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그해 4월 일본 군경의 강경 진압에 이천명 의병장은 총기를 은닉하고 일시 의진을 해산했는데, 김신명은 동료 최예타(崔禮他)와 함께 1905년 5월 27일 해주경찰서 순사대에 의해 피체되었다. |
조홍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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