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7.19 16:34 수정일 : 2022.07.19 16:41
작성자 : 조홍식
과거 강화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많은 애국지사가 순국하거나 투옥되었으나 이에 대한 사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강화 의병들의 공적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잠들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지난해 11월 4일 인천대학교(이사장 최용규)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강화군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제침략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30명을 추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화군은 현재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 30명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 및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강화 의병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의병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이학상(연기우 의진 의병), 조근봉·이경석(김용기 의진 의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 이학상 의병 판결문(경성지방재판소 1908.10.01.).
|
이학상(연기우 의진 의병) 생년월일 : 1883 연기우(延起羽) 의진의 서기(書記)로 경기도 강화·고양·교동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학상은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임을 절감하고 국권회복운동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사건으로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는 등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고, 8월에는 군대까지 강제로 해산되는 준식민지 상황이 되었다. 이 같은 시기에 군인들은 해산에 반대하여 무기를 들고 격렬한 시가전을 감행하였고, 지방에서도 군인들이 잇달아 봉기하여 의병에 합류하거나 의병을 조직하였다. 이때 이학성은 연기우 의병부대에 동참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8년 음력 3월부터 8월까지 의병장 연기우와 함께 의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강화·고양·교동 등지에서 부일배(附日輩)를 응징하는 한편, 군수물자와 군자금을 거둘 때 서기로서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8년 10월 1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7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학상 의병에 대한 경성지방재판소의 판결문(번역)> 위 사람에 대한 내란죄 피고사건에 대해 검사 소야정태랑(小野政太郞)이 심리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이유 이상의 사실은 피고의 공술, 피고에 대한 검사의 신문조서 및 피고의 경찰서의 청취서에 비추어 이를 인정한다. 피고의 소행은 형법대전 제195조에 해당하나 지휘자 하에서 범한 것이므로 동법 제80조, 동 제135조에 의해 수범의 율에서 1등을 감하고 범한 죄가 용서할 만하므로 정상 참작하여 다시 3등을 감하여 처단하기로 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경성지방재판소 형사부 |
▲ 조근봉·이경석 의병 판결문(경성지방재판소 1908.08.22.).
|
조근봉(김용기 의진 의병) 생년월일 : 1887 김봉기(金鳳基) 의진에 참여하여 경기도(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김봉기는 전 육군 기병대 부교(副校) 출신으로 1907년 12월 황해도 의병장 박정빈(朴正彬)의 휘하에서 창의돌격대 총대장이 되어 맹활약하고, 1908년 음력 6월경에는 동지들과 함게 강화군·교동군·풍덕군·개성군에서, 그리고 음력 7월경에는 강화군 말도(唜島)에서 각각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조근봉은 이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 강화지방을 중심으로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8년 8월 4일 강화도에서 일본군 헌병분견소 병사들과 교전하다가 붙잡혀 같은 해 8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 인천지부에서 유형 7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이경석(김용기 의진 의병) 생년월일 : 1885 1907년 일제는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한 광무황제의 특사를 문제 삼아 광무황제(고종)를 퇴위시키고 융희황제(순종)를 즉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강제하여 국권을 강탈하였다. 일본 통감부는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 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대한제국을 군대가 없는 나라로 만들었다.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자결로 저항하거나 민족적 이해에 눈을 뜬 애국적 군대로 탈바꿈하여 반일 의병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촉발된 후기의병은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참여하면서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무장력을 바탕으로 전국에서 반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경석은 김용기(金龍基) 의병장이 강화군 말도(唜島)를 근거지로 의병투쟁을 전개하자 1908년 5월경 그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8년 음력 6월 15일경에는 다른 의병들과 함께 망도(望島) 북쪽 기슭을 통과하는 범선 1척을 발견하고 범선에 실려 있는 쌀 20부대를 군량미로 확보하였다. 이경석은 의병투쟁 중 피체되어 1908년 8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유형 7년을 받고 고초를 당하였으며, 1910년 9월 5일자로 사면되었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근봉·이경석 의병에 대한 경성지방재판소의 판결문(번역)> 위 사람들에 대한 내란죄 피고사건에 대해 판결함이 다음과 같다. 주문 이상의 사실은 육군 헌병조장 좌야무길(佐野茂吉)의 피고들에 대한 체포수속서 및 피고들에 대한 강화도 헌병분견소의 각 청취서에 의해 이를 인정한다. 법률에 비추어 보니 피고들의 소행은 모두 형법댖던 제195조에 해당하나 수괴의 지휘에 따라 하수(下手)한 자이므로 동 제80조, 동 제135조에 의해 수범의 율에서 1등을 감하고, 또 모두 소범의 범정이 용서할 만하므로 동 제125조에 의해 각 3등을 감하여 이를 처단하기로 한다. 이에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경성지방재판소 형사부 |
조홍식 기자
최신 HOT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