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07.05 13:56 수정일 : 2022.07.19 16:33
작성자 : 조홍식
과거 강화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많은 분들이 순국하거나 투옥되었으나 이에 대한 사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강화 의병들의 공적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잠들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지난해 11월 4일 인천대학교(이사장 최용규)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강화군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제침략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30명을 추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화군은 현재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 30명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 및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강화 의병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의병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연기우(강화의병장)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 연기우 강화의병장은 지난 2015년 8월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자료 = 국가보훈처>

▲ 연기우 의병장 격문(훈시문) 관련 일제 기밀문서. <통감부문서> 6권(1909.04.16.) 일부.

▲ 연기우 의병장 전사 순국 기사.(매일신보. 1911.12.28).
|
연기우(강화의병장) 이명 : 연기호(延基浩 / 基鎬), 연봉렬(延奉烈)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분견대(江華分遣隊)에서 부교(副校)로 복무하던 중 1907년 8월 군대해산이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강행되자 통분한 나머지 거의할 것을 결심하였다. 8월 10일 유명규(劉明奎)를 중심으로 강화분견대를 해산하러 온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후 경기도 장단으로 나아간 연기우는 덕물포(德物浦)에서 의진을 수습하여 거의하였다. 동지 김동수(金東秀)가 피체되어 피살되고, 지홍윤이 황해도로 진출한 후 홀로 부하 60여 명을 거느리고 적성(積城)·삭령(朔寧)·철원(鐵原)·마전·장단·도산 등지로 진출하였다. 본랜 군인 출신인데다가 지(智)와 용(勇)을 겸비하여 싸우면 반드시 이겼으므로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또한 군율이 엄정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어 도처에서 민심을 얻었으므로 지방민의 비호로 적을 크게 무찔러 많은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연기우는 공사를 분명히 가릴 줄 아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삭녕 등지로 행군하는데 아들이 찾아와서 온 가족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정황을 고하였으나 꾸짖고 조금도 돌보지 않았다. 그의 부하 중의 한 사람이 몰래 아들에게 50원을 주었으나 그것을 안 연기우는 크게 노하며, “이것은 군수금(軍需金)이다. 누가 감시 사사로 쓸 수 있겠는가!” 하고 그 돈을 빼앗았다. 1907년 가을에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창의대진이 형성되고 서울진공을 감행하였을 때 연기우도 부하들을 거느리고 참가하여 대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1월에 이르러 홍천, 춘언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 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무릇 48진, 약 1만에 달하였음. 허위를 군사로, 이강년(李康秊)을 호서장으로, 이태영(李泰榮)을 진동장으로, 김준수(金俊洙:김수민-필자 주)를 안무장(安撫將)으로, 연기우를 대대장으로 삼아 바야흐로 경성에 들어가려고 하여 약 30리 지점에 달하였음. 이 동안 전투가 38회에 달함.(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8권. 1909년 6월 12일) 1908년 2월 이후에는 허위(許蔿)를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조수연(趙壽淵)·김규식(金奎植)·홍인관(洪仁觀)·이병채(李秉采)·장순원(張洵遠)·오수영(吳壽榮)·김연상(金演相) 등과 함께 적성(積城) 방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대외적으로 협력세력 규합을 위하여 경현수(慶賢秀)를 중국 혁명당에 밀파하고, 전국적인 의병연합을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6월에 의병 총대장 허위가 되고 10월에 교수형으로 순국하자 연합의진 계획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1908년 가을 이후에는 강기동(姜基東) 의진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 21일 2백여 명을 영솔하고 포천군 송우(松隅) 등지에서 일본 헌병대와 장시간 교전 끝에 적 2명을 사살하고 잔병을 격하였다. 12월에는 부하 4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철원군 동면을 지나갈 때 신내(新內) 주점(酒店)에 일본헌병과 보조원 등 7명이 묵고 있음을 탐지하고 단신으로 그 주점에 갔다가 체포당하였다. 기다리고 있던 부하들이 이를 알고 17명이 주점을 공격하여 연기우를 구출했을 뿐만 아니라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귀대하였다. 한 번은 강기동이 포천군 송우 등지에서 일본 헌병과 교전하다가 왼쪽 다리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는 정보를 접하고 부하 30명을 급파하여 강기동을 보호케 하였다. 한편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이진룡(李鎭龍) 의진과도 긴밀한 협조하에 일본군 연합 부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따라서 황해도·경기도 일대의 의병진은 연기우를 중심으로 하여 이진용·강기동의 세 의진이 이합집산을 교묘히 해 가면서 또한 각기 독자성을 가지면서 활약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점차 일본군의 이들에 대한 대처가 강화되어 가자 이들은 부대 구성을 소수정예 부대로 편성하여 게릴라전으로 전환시켜 1910년까지 그 유대감을 잃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연기우의 아우 연창수(延昌壽)가 체포되어 순국하는 비극을 당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양척식회사 설립 계획에 대하여 대한협회·황성신문 등과 함께 적극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09년 8월 이후에는 대체로 철원·연천(漣川)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1910년 2월부터 일제가 의병소탕전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점차 패색이 짙어져 갔다. 연기우는 삭령으로 이어서 안협(安峽)으로 물러났고, 4월에는 장단(長湍)에서 크게 패하였다. 5월에 적에게 체포되었으나 벗어날 수 있었다. 그즈음 연기우는 방탄 요갑(腰甲)을 차고 있었다고 전한다. 그것은 우피(牛皮) 두겹으로 만들어졌으며 굵고 넓은 쇠못으로 장치되고 길이는 6척 1촌 5푼이었으며, 넓이는 1척 7촌이었다. 거기에는 무수한 탄흔자욱이 나 있었지만 탄환이 뚫을 수 없을 정도의 훌륭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것 때문에 연기우가 이처럼 용맹스럽게 오랫동안 격렬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순국에 대하여는 두 견해가 서로 엇갈리고 있다. 즉 「한국독립사(韓國獨立史)」에는 1910년에 체포 피살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에는 「매일신보」 1914년 6월 23일자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그의 부친 연성한(延成漢)과 함께 인제 일본헌병분대에 의하여 체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국가보훈처·광복회·독립기념관 공동으로 ‘이달의 독립운동가(2015년 8월)’로 선정된 연기우 의병장에 대하여 국가보훈처가 정리한 주요 공적으로 “강화진위대 복무, 군대해산 후 제물포에서 거의”라고 하였고, 공적 서술에서 “강화진위대 부교였던 연기우는…제물포에서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라고 하였으나 이는 큰 오류다. 강화진위대는 강화분견대로, 제물포(濟物浦)는 덕물포(德物浦)로 고쳐야 한다. 국가보훈처의 각종 기록은 일반인에게 공인된 기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오류를 최소화해야 하고, 발견된 오류는 시급히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
조홍식 기자
최신 HOT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