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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의병 열전] 6. 심노술(김용기 의진 부장), 유명규(강화분견대 봉기 주도)

작성일 : 2022.06.23 16:35 수정일 : 2022.06.24 09:54

작성자 : 조홍식 (hscho4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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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강화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많은 분들이 순국하거나 투옥되었으나 이에 대한 사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강화 의병들의 공적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잠들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지난해 11월 4일 인천대학교(이사장 최용규)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강화군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제침략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30명을 추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화군은 현재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 30명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 및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강화 의병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의병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심노술(김용기 의진 부장), 유명규(강화분견대 봉기 주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 일제의 귀순 권유에 대한 심노술 의병장의 거부(폭도에 관한 편책 1908.05.08.).

 

▲ '군함과 수뢰정으로 강화 앞바다에서 폭도토벌에 나섰다'는 기밀보고서에 '풍덕 거주 심노술' 의병장이 나타나 있다(폭도에 관한 편책. 인경비 제350호).

 

▲ 통감부문서 4권에 실려 있는 유명규 의병장 피체 후 피살 문건. 유명계(柳明啓)라는 다른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심노술(김용기 의진 부장)

생년월일 : 미상
사망년월일 : 미상
본적 : 황해도 평산

박기섭(朴箕燮) 의진의 중대장으로 황해도 평산·연안·배천·해주, 경기도 강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러일전쟁 직후 일제의 강요와 위협 아래 1905년 11월 체결된 을사늑약은 우리 민족에게 국망의 위기를 절감하게 하였다. 국권강탈 행위인 을사늑약은 일제가 그간 은폐해 왔던 한국 식민지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해 반일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그것은 크게 두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하나는 장기적인 실력양성운동으로 언론활동·종교활동·교육활동·학술활동 등을 통한 국민 계몽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즉각적인 무력투쟁인 의병활동이었다. 특히 의병활동은 1907년 7월 정미7조약에 따른 군대해산으로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박기섭 또한 군대해산 직후에 황해도 유림계 인사들의 추대로 거의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박기섭 의진은 황해도 평산에 근거지를 두고 각 지방에 격문을 돌려 4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부대편성을 마쳤는데, 이때 심노술은 김정환(金正煥)·한정만(韓貞萬)·인두정(印斗鼎)·변승준(邊承準)·신도희(申道熙)·신성보(愼成甫) 등과 함께 중대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리하여 심노술은 박기섭 의진의 중대장으로서 1907년부터 1908년 사이에 황해도 해주·연안·평산 등지와 경기도 강화군 연해의 여러 도서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순사주재소 및 출장소를 공격하는 등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의병활동이 쇠퇴하여 가자 그는 중국 요동(遼東)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분사(憤死)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통감부문서 4권에 실려 있는 유명규 의병장 피체 후 피살 문건. 유명계(柳明啓)라는 다른 이름으로 표기돼 있다.

 

유명규(강화분견대 봉기 주도)

이명 : 유명계(劉明啓)
생년월일 : 미상
사망년원일 : 1907.09.06.
본적 : 경기도 통진군(通津郡)(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1907년 8월 10일 진위 제1대대(본부는 수원) 강화분견대 병사들은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하였다. 강화분견대 참교(參校) 출신 유명규는 부교(副校)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주민 약 5백 명의 호응을 얻어 사졸 50명과 함께 소대장 부위 민완식(閔完植)과 참위 민영락(閔泳洛)에게로 달려가 무기를 내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들이 거절하자 사졸들과 주민들은 무기고로 달려가 돌로 무기고를 파괴한 후 무기를 탈취하였다. 민완식이 그들을 만류하자, “소대장을 죽여라”하고 외치면서 달려들어 해치려 하는 바람에 민완식과 민영락은 도주해 버렸다. 이리하여 강화분견대 병사들은 위관급을 완전 축출하고, 이날 오후 6시 사병 50명이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봉기하였다. 분견대 사졸들과 군중들은 먼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이어서 군아(軍衙)로 달려가 군수이자 일진회의 총무인 정경수(鄭景洙)를 처단하고 강화성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급보를 접한 일본군 사령관은 진위 제1대대의 해산 임무를 띤 고쿠라(小倉) 대위에게 보병 1개 소대와 기관총 2문을 주어 이를 진압케 하였다. 10일 오후 4시 이들 일군이 갑곶동(甲串洞)으로 상륙하려 할 때 봉기한 진위병 사졸 50명은 갑곶동 동쪽 주벽(周壁)에 매복해 있다가 이들에게 일제 사격을 가하여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고 강화부 동문쪽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봉기한 병사들에게 많은 군중들이 호응, 합세하여 그 수가 8백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이들은 성벽에 의지하여 굳게 성을 방위하였다. 이날 전투에서 일군은 전사 6명, 부상자 5명의 손해를 입었다. 일군 사령관은 10일에 다시 2개 중대에 기관총 2문, 공병 1소대의 증원군을 파견하였으나, 11일 진위 봉기군은 이미 이곳을 철수한 후 통진, 해주 등 해서(海西)로 이동하여 그곳의 의병부대와 합류한 다음이었다. 유명규는 9월 6일 통진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일본군 위병소에 유치되었는데, 계속 저항하다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조홍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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