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1.08.23 11:56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치의 계절, 여기저기서 ‘말’의 전쟁이 벌어진다. 정치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곧 그 사람의 평판으로 이어진다. 로버트 그린은 『권력의 법칙』에서 “평판은 권력의 초석이다. 평판 하나만으로도 상대를 위협하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상대방을 너무 과도하게 공격하면, 공격의 대상보다 공격 대상자의 복수에 더 많은 관심이 주목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단 상대방이 평판에 흠집이 나면 사방에서 공격을 받게 되지만, 상대방은 그냥 무너질 리가 없다. 죽기 살기로 복수 혈전을 벌이게 될 것이고, 복수를 위한 ‘말’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게 된다는 의미다. 결과적으론 비전 없는 정치인의 ‘입’이 대중의 정치 혐오증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요즘의 정치권에선 민망스런 ‘입’이 극성을 부린다. 대한민국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들이 국가의 미래 비전 제시는 뒷전으로 미루고 당장의 이(利)를 취하려 거친 말을 쏟아낸다. 정치인들은 말로 먹고 산다는 말이 있다고는 해도, 대체 우리 국민을 어떻게 보고 세치 혀를 함부로 놀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선 후보 경선이 진행 중인 민주당이나 곧 후보 경선이 시작될 국민의 힘이나 도긴개긴이다. 현재는 민주당 내 대선 후보 간 말싸움이 볼썽사납지만, 국민의 힘 또한 경선이 본격화하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권 정당을 자처하는 여야의 대선 후보들의 거친 입은 현실 정치의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지도자의 품격은 곧 국격, 말 한마디가 국민에 큰 영향
국가 지도자의 품격은 곧 국격이다. 지도자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는 국민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몇 해 전 김봉중 전남대 사학과 교수가 펴낸 『이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를 읽은 적이 있다. 책 내용이 흥미롭다. 김 교수는 존경받는 미국 대통령 11명의 품격을 ‘자부심, 되새김, 관용과 포용, 미래 설계’ 네 가지 품격으로 분석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자부심, 28대 우드로 윌슨은 중립주의를 보편적 원칙으로 재탄생시킨 되새김의 상징으로 꼽았다. 남북전쟁 후 통합을 이끈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은 관용과 포용, 서부시대 개척의 초석을 세운 3대 토머스 제퍼슨은 미래 설계자로 분석했다.
미국 대통령들의 ‘자부심, 되새김, 관용과 포용, 미래 설계’의 네 가지 포인트는 우리 지도자들에게도 요구되는 품격이다. 정제된 말과 그 말을 책임지는 행동은 국민에게 믿음을 준다. 지도자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말에 대한 신(信)은 곧 지도자의 품격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공자(孔子)는 중용(中庸)에서 이렇게 말했다. 입의 중심 즉, 말의 중심을 지키는 사람은 세상의 근본이 되며, 이웃과 주변을 조화롭게 만들어 가는 사람은 세상의 기본적인 도리를 통달한 사람이다(中也者는 天下之大本, 和也者는 天下之達道). 공자의 말이 21세기 인공지능(AI) 시대에 더 절실하게 와 닿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바뀌지 않고 있는 탓이리라.
자부심, 되새김, 관용과 포용, 미래 설계 리더십 절실
외국 지도자의 거친 입 가운데 생각나는 인물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임기 4년 내내 거친 말을 쏟아냈다. 그의 거친 입은 취임 초부터 예견됐었다. 대선 후보 당시 음담패설 육성녹음 테이프가 공개돼 곤욕을 치렀다. 테이프 내용은 트럼프가 2005년 NBC방송의 진행자 빌리 부시와 나눈 대화였다. “당신이 스타라면 여성들의 그곳을 움켜쥘 수 있다.” 미국인들은 경악했다. 그런데 대통령 취임 후에도 막말을 계속했다.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렸고 결국 재선에 실패했다. 트럼프가 훗날 『이런 대통령을 만나고 싶지 않다』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겠다.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2017년 봄 세계인을 놀라게 했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는 반군 소탕에 투입된 장병들을 위문하는 자리에서 “계엄령의 결과와 파장은 내가 전적으로 책임질 것이다. 여러분이 (여성을) 3명까지 강간한다면 내가 한 짓이라고 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농담이었을까. 농담도 농담 나름 아닌가. 두테르테는 세계 인권·여성단체들의 비난이 쏟아지자 “사기 진작을 위해 허세를 부린 것”이라고 변명했다.
두테르테의 설화(舌禍)는 여러 번 있었다. 대통령 후보시절에는 1989년 교도소 폭동사건을 언급하면서 혀를 잘못 놀렸다. 당시 수감자에게 집단 성폭행당하고 살해된 호주 여성 선교사에 대해 “그녀는 아름다웠다. 내가 먼저 했어야 했는데”라고 했다고 한다. 호주 정부가 항의하고 국제 문제로 비화돼 시끌시끌했다. 그런데도 필리핀 대통령이 됐다. 두테르테의 인격도, 필리핀의 국격도 땅에 곤두박질쳤다. 그래도 6년 단임제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고 있다. 남의 나라 얘기를 굳이 소개한 것은 지도자의 품격을 타산지석으로 삼자는 의미다.
상대방 칭찬하면서 비전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필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입도 부끄럽다. 나토(NATO)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나토는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고 입만 놀린다(No action, Talk only)”는 뜻이다. “지도자의 말은 곧 거짓말”이라는 통념이 퍼지는데 정치인들이 앞장서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인의 말은 곧 그의 철학과 신념을 비추는 창(窓)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뿌연 창을 보고 있다. 정치 지도자들의 갈등이 아래로 내려가면 죽고 죽이는 전쟁이 될 수 있고, 지도자에게서 가시가 나오면 아랫사람들에게서는 총, 칼이 나올 수도 있다. 작금의 지역감정과 진영 갈등도 다 정치인 책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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