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12.20 08:43 수정일 : 2023.12.20 08:45
▲전등사는 이동휘와 이능권의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했던 장소다. 1907년 8월 2일 진위대원인 지홍윤, 정기우, 유명규, 김동수 등이 이곳에서 비밀리에 국권회복을 협의했다. <사진=국가보훈부>
1909년 2월 4일, 인천경찰서장 경시 미야다테(宮館貞一)는 강화 지역 외 황해도 배천·연안·평산 등지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강화의병장 지홍윤(池洪允·일명 지홍일池洪一)을 1월 30일 개성경찰서 순사대가 체포했다는 것과 그의 행적에 대하여 내부경무국장 마쓰이(松井茂)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지홍윤은) 강화군 강화읍 내에서 출생해 20세에 이르러 소집돼 진무영(鎭撫營) 진위대 병정이 되고, 재역(在役) 2년에 부교(副校)가 되어 제주도에 주둔을 명받고 동지(同地) 재역 3년 만기 제대 후 동지에 거주하기 3년으로 지난 융희 2년 봄 본적 강화에 귀래하여 다른 사람들과 서로 왕래, 기맥을 통하고 동년 4월 말 처음으로 도당(徒黨) 40~50명을 인솔, 황해도 배천군 불암리 및 강화 제도(諸島)의 각 면을 횡행, 폭거를 하기에 이르렀다”
강화도에서 지홍윤의 의병투쟁에 대한 기록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1908년 4월 이후인데, 그는 김용기, 박계석(朴啓石), 심노술(沈魯述), 연기우(延基羽), 이능권(李能權) 의진과 연계하기도 했다.
편제상으로는 김용기가 총대장이었고, 심노술이 부대장, 그는 박계석과 함께 김용기 의진의 중대장 또는 별장(別將)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기록을 보면 그는 배를 이용하여 강화도는 물론 강화지역 석모도 등의 섬 지역과 황해도 배천·연안 지역을 오가며 의병투쟁을 벌인 기록이 수차례 나타난다. 그가 김용기, 연기우 의병장과 같은 날 의병투쟁을 벌인 기록도 보인다.
한편 강화 의병은 1907년 8월 9일 강화분견대 봉기로부터 시작돼 그 해 엄청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지홍윤 의병장은 자신이 의병에 참여한 시기를 1908년 4월이라고 진술했다. 이것은 모든 행적을 진술해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우려가 있어 가급적 진술하지 않으려는 여느 의병장처럼 종전의 행적을 진술하지 않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Ⅱ권 ‘한국광복군소사’(1943)에는 66명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공적이 담겼는데 지홍윤은 군대 해산에 반발, 자결한 박승환(朴昇煥)에 이어 19번째로 소개될 만큼 훌륭한 인물로 기록했다. 이 책에는 지홍윤이 강화분견대가 해산된 다음 날부터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는 기록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일본군에 피체돼 진술한 내용과 많은 차이가 있다.
“지홍윤. 강화진위대 부교였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였습니다. 국방군 해산령이 내려진 다음날 휘하를 이끌고 기의하여 일군 1개 중대를 격살하였습니다. 이어 제물포 지역을 전전하며 여러 차례 일군에게 큰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강화도를 점령하자 휘하를 이끌고 해서로 근거지를 옮기고 민군을 모집하여 재차 활동을 도모하였습니다. 많은 현상금을 내건 일군에 의해 체포된 뒤 사형되었습니다.”
남기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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