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11.13 17:37 수정일 : 2023.11.13 17:42
▲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권태철 지사의 유공자 정보. 출옥 이후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후손이나 묘소의 행방도 묘연하다. <자료=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권태철 지사는 1897년 7월 12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仙源面) 연리(煙里)에서 태어났다. 가정환경과 성장 과정 등은 알려진 바 없다.
그는 1919년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부내면(府內面, 현 강화읍) 신문리(新門里) 시장에서 큰 종이로 만든 기(旗)를 들고 ‘독립 만세’라고 외치며 시위대의 선두에 섰다.
그 뒤를 따르는 군중은 작은 종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강화경찰서 순사보 김덕찬이 권 지사의 기(旗)를 빼앗으려 하자 그의 뺨을 때리며 온몸으로 저항했다.
▲지난 2019년 3월 18일 제100주년 3‧1절을 맞아 진행된 강화도만세운동 재현행사 모습. <사진=강화군>
이날 강화 읍내 시장에 모인 대규모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 등을 돌며 만세 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특히 경찰서 앞에서 시위 중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일본 경찰은 상황이 위급해지자 구금자를 석방할 수밖에 없었고, 시장으로 돌아온 시위 군중은 밤늦게까지 만세를 부르고 해산했다. 이튿날부터 일본 군경은 시위 참가자와 주도자들을 체포했다.
권 지사는 이때 체포돼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미결 구류 210일 본형 산입)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권 지사에게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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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권태철을 징역 10월에 처하고 미결 구류일수 210일을 본형에 산입한다. 1. 증인 김덕찬의 예심조서 중, ‘3월 18일은 이른 아침부터 강화 읍내 시장의 취체에 8인 정도의 순사보와 같이 나가 있었는데, 오후 2시 경 신문리(新門里) 시장 쪽에서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여 피고 유희철은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조선독립(朝鮮獨立)”이라고 쓴 천으로 만든 기를 떠받들고 있었으며, 그 밖의 군중은 종이 기를 들고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관청리 쪽으로 행진하여 왔으므로 우선 그를 경찰서로 인치하고, 다시 시장에 가니까 관청리 시장에서 피고 장상용은 구 한국 기를 떠받들고서 군중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므로 그를 체포하고, 이어서 피고 조기신도 체포하여 경찰서로 연행하고서, 3차로 시장에 나갔더니, 신문리 시장 남쪽 끝에서 큰 종이로 만든 기를 떠받든 남자 1인이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그 뒤에서 작은 종이 기를 휘두르며 같이 만세를 부르면서 오므로, 자기는 그 큰 종이 기를 빼앗으니까, 그 기를 들고 있던 자가 갑자기 자기에게 반항하여 오른손으로 기를 붙잡고 왼손으로 자기 따귀를 치길래, 그 자를 잘 보니까 피고 권태철로써 그가 이렇게 난폭하게 굴자 그의 뒤에 있던 군중들은 자기 주위로 몰려 들어 치고 차고 받고 하는 상황이므로 자기는 마침내 그곳에 쓰러져 거의 실신할 듯하였으나 분연히 일어서서 칼을 빼어 휘두르다가 틈을 타서 경찰서로 도망쳐 돌아왔다. 그때 군중들은 이 쪽에 1단 저 쪽에 1단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군중이 군청에서 군수에게 대하여 ‘만세를 부르라’고 강박하여 곤란하니 와달라”는 사환이 와서, 곧 순사·순사보 10수 명 군청에 달려 갔더니, 유봉진은 조선독립 연설을 하고,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군중들은 다시 객사·공자묘를 돌아 저녁 때 길에서 경찰서로 몰려가서 “앞서 군중 속에서 체포한 사람을 돌리라. 그러지 않으면 달려 들어 탈환하겠다”고 하며 작은 돌을 가지고 폭행하려는 모양이었다. 또한 피고 이봉석은 선두에 서서 “김덕찬을 내어 놓아라. 죽여버리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며, 뒤에서도 같이 말하고 있는 자가 있었다. 권태철 지사의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19.12.18.) 中 |
남기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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