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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의 세상 촉] 학벌과 실력

작성일 : 2023.08.28 17:52 수정일 : 2023.08.28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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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대한민국 사회에서 연(緣)은 끈질기다. 혈연·지연·학연에 군대연·흡연까지 연도 참 많다. 사람과 사람이 인연(因緣)을 맺는 것은 소중하다. 가족 이외에는 누구나 모르는 사람을 만나 아는 사람이 되고 친해진다. 혈연보다 지연이나 학연, 군대연이 더 끈끈하다는 말도 있지만 가장 끈끈한 것은 흡연(吸緣)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애연가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도 담배 한 개비를 그냥 내주고 라이터가 없어도 불을 쉽게 빌린다. 담배를 피는 동안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그래서 흡연족이 가장 끈끈하다는 농(弄)이 나온다. 

혈연·지연·학연에 군대연까지 연줄 사회 

대한민국은 ‘1.5 디그리(dergee) 사회’라고도 한다. 즉, 1.5 단계만 거치면 사돈의 팔촌까지 다 알 정도로 좁은 사회라는 뜻이다. 실제가 그렇다. 누굴 만나더라도 한 다리 건너 두 다리만 걸쳐도 금방 연이 닿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말 몇 다리 건너도 모르는 경우는 아무 연고가 없는 지역을 여행할 때 만나는 낯선 이들일 정도다. 직장이나 친목회 등 갖가지 형태의 모임은 서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니 ‘민증’ 까고, 족보 들추고, 출신 학교 따지다 보면 이리저리 얽히게 되는 게 우리 사회다. 
 
세월이 흐르면서 연줄의 힘은 약해지고 있다. 이른바 “내가 누구를 안다”는 식의 ‘빽’이 통하는 시대는 갔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추세다. 그런데 연줄은 조직에 긍정적인 요인보다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특정 집단이 특정 출신으로 채워지면 선후배로 엮인 묘한 관계 때문에 일하기가 곤란해진다. “고향 선배인데, 학교 선배인데, 군대 고참인데”와 같은 식이라면 난감하다. 학연은 냉철하고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결정을 하는데 난감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 물론 연대가 끈끈해지는 증정적인 면도 있기는 하지만.

학벌 풍조는 대한민국 사회의 이상한 풍조

대한민국 사회에서 학력과 학벌은 여전한 논쟁거리다. 학력은 공부를 어느 단계까지 했느냐를 말한다. 초중고를 졸업했는지, 대학을 졸업했는지, 대학원에서 석사나 박사를 했는지가 학력이다. 그런데 학벌은 명문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했는지 여부로 정리된다. 실력이 뛰어나도 명문 학교를 나오지 못하면 “학벌이 달린다”라며 자탄하는 이들도 있다. 영화 속 대사처럼 “나 이대 나온 여자야”가 상징적이다. 학벌 권장하는 우리 사회가 만든 이상한 풍조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이 심한 곳 중 하나는 법조계다. 판검사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고 서울대 중에서도 당연히 법대 출신이 지배적이다. 이들의 정계 진출도 적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고 정치인이 됐다. 역대 대통령 중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속의 학벌 논란과 거리가 멀다. 두 분 다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다. 실력으로 학벌을 눌렀다. 대통령은 시험을 보고 뽑는 자리가 아니라 민심이 선택하는 자리란 걸 보여줬다. 
  
다시 법조계 얘기를 하자. 윤석열 대통령은 8월 22일 새 대법원장 후보에 이균용(61세, 사업연수원 16기)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명했다. 이 대법원장 후보자는 윤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다. 이 후보자가 대법관에 임명되면 대법원은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중 10명이 서울대 출신이다. 나머지 다섯 명은 건국대 1명, 고려대 1명, 한양대 1명, 이화여대 1명이다. 14명 가운데 0명이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 성향을 떠나서 학벌 쏠림이 과도하다.

대법관 14명 중 10명 서울대, 학벌 편중 심해

서울대를 포함한 이른바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대 출신은 전체 장차관급 인사 185명 가운데 116명(62.7%)이나 된다. 문재인 정부 때 통계인데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이 비율이 더 높아지고 있다. 물론 인재 풀이 제한적인 나라에서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그런 불가피성과는 무관하게 기득권층이 자신의 울타리를 지켜 줄 사람을 학연에서 찾는다는 비판도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실력과 능력보다는 학연이 더 출세의 요소라는 게 합당한가. 

세계적인 K-팝 아티스트로 성장한 방탄소년단(BTS)은 사이버대학 출신이다. 실력은 세계 최고인데 학벌은 사이버대다. 얼마나 멋진가. 세계의 음악팬들은 BTS의 학벌을 보고 열광하는 게 아니다. 실력을 보고 열광한다. BTS 멤버인 정국, RM, 슈가, 제이홉, 지민, 뷔는 글로벌사이버대를 졸업했다. BTS는 마음만 먹으면 국내외 유명 대학도 진학할 수 있었을 것이다. 유명 대학에 진학해 평생의 학벌을 가질 수 있었는데 실리를 택했다. 그게 진짜 실력이다.

BTS는 학벌 아닌 실력… 공직도 능력 중심 인사를

만일 BTS가 사이버대를 선택하지 않고 SKY대학에 진학할 기회가 있었다면 오늘과 같은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까. 학벌을 좇지 않고 실력을 다져온 젊은이들의 용단은 우리 사회가 다 같이 격려하고 응원해야 할 일이다. 체육계에 만연하던 학벌주의도 많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어느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실력이 뛰어나도 국가대표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가장 심했던 종목이 축구였는데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그 질긴 연줄은 산산조각 났다. 실력이 곧 국가대표가 된 것이다. 4강 신화의 주역은 학벌과는 상관없는 선수가 많았다. 

공무원 조직도 마찬가지다. 학벌 중심의 조직을 혁파해야 한다. 사회 전반적으로 학벌의 ‘괴물’이 사라지고 있는데 유독 중앙정부의 국무위원이나 법조계의 ‘학벌 카르텔’은 깨지지 않는다. 사회가 급속하게 변화하는데 실력보다 학벌을 더 중요시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러니 학부모들이 허리가 휘청해도 아이들에게 ‘학벌’을 안겨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이런 사회는 미래가 밝지 않다. 학벌로 얽힌 연줄과 상관없이 실력을 우대하는 사회의 미래가 밝다. 중앙정부가 솔선해야 한다. 언제까지 학벌에 기댄 정치를 할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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