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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복의 우리말 산책] 우리말에 스며든 영어식 표현

작성일 : 2023.08.2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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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실향민·귀순자·귀순용사·탈북자 등으로 불려
최근에는 ‘탈북민’ 이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쓰여

과거에는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넘어온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당연히 그들을 대할 기회가 적었고 상당한 거리감을 느꼈다. 요즘은 TV에서도 북한을 탈출해 온 사람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다. 안방에서 그들을 대하기가 쉬워졌고 그들과 느끼는 거리감도 많이 없어졌다. 최근에는 남한에 정착해 유튜브를 하는 사람도 많아졌다. 북한에서 이주해 온 사람은 지난해 6월 기준 3만3000명(누적)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과 관련해 늘 고민스러운 것이 이들을 부르는 용어다.

북한에서 남한으로 온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은 시기별로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광복 후 6·  25   전쟁 때까지 넘어온 사람들은 흔히 실향민이라고 불렸다. 그 이후 체제경쟁이 본격화되면서 귀순자로 불렸고 5공 정권 시절 이후로는 귀순용사로 불렸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에서 식량난이 본격화되면서 중국으로 넘어오는 북한 사람이 급격히 늘었고 남한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도 급증하면서 탈북자라는 새로운 용어가 생겨났다.

귀순자·귀순용사는 냉전적 이미지 강해

정부는 귀순자 또는 귀순용사가 냉전적 이미지가 강하다며 탈북자나 북한이탈주민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러다 통일부는 남북한 간의 새로운 협력시대를 맞아 정치적 색채가 강한 탈북자를 대체하는 새로운 용어를 만든다면서 2005년 1월 ‘새터민’을 공식용어로 선정한다. 하지만 새터민은 여러 측면에서 비판이 일었다. 새터민은 조어법상으로도 문제가 있다. 이 용어가 선정될 당시 필자는 신문 지면에서 이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정부는 새터민이 새로운 터전에서 삶의 희망을 갖고 사는 사람이란 뜻이라고 했다. 

새터민은 ‘새(관형사)+터(터전)+민(民)’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나 새터민은 단어가 결합할 때는 ‘순우리말+순우리말’ 또는 ‘한자어+한자어’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기본 원칙을 무시한 것이다. ‘순우리말+한자어’로 된 단어는 예외적이어서 지극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특히 새터민과 같이 ‘순우리말+민(民)’으로 구성된 단어는 없다. 거주민·  교민  ·  영세민  ·  피난민  ·  이주민  ·  이재민 등 모두가 ‘한자어+민  (民)’이다.

‘새터민’은 조어법상 문제, 탈북단체도 반대

이 외에도 새터민을 두고 말이 많았다. 탈북자들에 대한 정신적·  물질적 대우가 중요하지 용어를 바꾼다고 뭐가 달라지느냐, 북  한 체제를 거부하고 자유를 찾아온 사람을 먹고살기 위해 찾아온 경제 난민 취급하는 것이냐는 등 부정적 시각이 적지 않았다. 탈북단체에서도 새터민이란 용어를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치적 색채가 완전히 배제돼 정체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로 인해 많은 탈북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더 무시당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한 사람 가운데는 우리는 그럼 ‘헌터민’이냐는 농담을 하는 이도 있었다.

어쨌거나 이후에 새터민은 정부 문서나 신문 기사 등에서 사용하려는 노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탈북자나 공식 용어인 북한이탈주민이란 말이 도로 쓰였다. 그러다 최근 들어 부쩍 사용 빈도가 늘어난 것이 탈북민이다. 탈북민이라면 북한이탈주민의 줄임말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탈북국민이라는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한자어 ‘민(民)’이 국민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탈북민이 지금까지 나온 용어 가운데 가장 나아 보인다는 것이 대체적 평가다. 그러나 이 용어도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탈북민의 ‘민’을 국민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무사히 한국에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만 북한을 탈출해 아직도 중국 등지에서 떠도는 사람들에게는 맞지 않다. 그러나 노숙자를 노숙인, 장애자를 장애인이라 하듯이 ‘자’자를 버리는 추세를 감안하면 탈북자보다 탈북민이 조금은 나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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