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8.25 13:55 수정일 : 2023.08.28 14:13

▲김형주 애국지사. <사진=국가보훈부>
김형주 애국지사는 1898년 9월 21일 경기 강화군(江華郡) 하도면(下道面) 상방리(上防里) 582번지에서 부친 김성권, 모친 박영애의 차남으로 태어나 양도면 조산합일학교 보통과, 흥천합일학교 보습과를 졸업한 후 부친에게 한학을 배우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기독청년이었다.
그러던 중 1919년 독립만세 운동에 가담하게 되는데 애초부터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읍내면의 만세시위 계획은 기독교 북감리교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3월초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에 살던 유봉진(劉鳳鎭)에게 연희전문학교 학생 황도문(黃道文)이 방문하여 서울의 운동 소식을 전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3월 9일 오후 3시경 길직리(吉稷里) 예수교회당에서 길직리와 선두리(船頭里), 온수리, 상방리 주민이 모여 회합을 가지면서 계획이 구체화되었고 이날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3월 18일 강화 읍내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군중들이 ‘조선독립’ 깃발을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강화읍내 시장을 행진하였다. 유희철(劉熙哲)·황일남(黃日男)·황윤실(黃允實)·장동원(張東元)·장명순(張明淳) 등이 앞장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자 이에 동참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시장에서 군청, 객사, 공자묘 등을 행진하며 만세를 외쳤다.
당시 강화읍 내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원은 1~2만 명에 달하여 강화경찰서는 만세시위를 진압할 수 없었다. 군청 앞에서 독립연설회가 진행되었고 “조선독립을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하여 파괴하겠다”는 말에 강화군수 이봉종도 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오후 5시경에는 경찰서를 포위하고 억류된 사람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해 유희철·장상용(張相用)·조기신(趙基信) 등이 풀려났다. 군중들은 시위를 계속하다 오후 11시경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3월 19일 오전 8시부터 일제가 용산에서 보낸 보병 대위 이하 40명의 군인들로 시위참가자들을 체포할 때, 김 지사도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이로 인해 김 지사는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 및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5월 및 벌금 20원(미결 구류 일수 150일 본형 산입, 벌금을 납부하지 않을 시에는 20일간 노역장 유치)을 받고 풀려났다.
이에 정부는 김 지사의 공적을 기려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김형주 애국지사 경성지방법원 판결문(1919.12.18.). <자료=김형주 애국지사 손자 김진선(金鎭善)>
<판결문 번역>
피고 김형주, 방렬을 각 징역 5월 및 벌금 20원에 처하고 모두 미결구류 일수 150일을 본형에 산입한다. 단, 벌금을 완납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20일 동안 노역장에 유치한다.
지현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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