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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야 할 강화의 인물] 강화 3.1만세운동 중심인물 유봉진

작성일 : 2023.08.14 16:18 수정일 : 2023.08.14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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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3.1만세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 유봉진. <자료=인천광역시>

애국지사 유봉진 선생은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으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선생은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 읍내(府內面邑內) 장터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했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3월 8일 자기 동네인 길상면 온수리(吉祥面溫水里) 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황도문(黃道文) 등과 만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세우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튿날 교회로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였다.

3월 9일 교회에는 염성오(廉成五)·유희철(劉熙哲)·장흥환(張興煥) 등 수십 명이 모였는데 이때 조종환(趙鍾桓)이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상황을 설명하고 강화에서도 호응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유봉진은 3월 12일 독립운동 참가를 권유하는 연설을 하려고 서도면(西島面) 주문도(注文島)로 떠났다가 17일 밤 온수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염성오・장윤백・황유부 등은 황도문이 가져온 인쇄물을 바탕으로 문서를 다시 작성한 후 이를 황유부의 집에서 인쇄했다. 이렇게 인쇄된 격문 「강화군민에게」는 13일에서 16일 사이에 기독교도 주도하에 여러 경로를 통해 배포했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강화 읍내장(邑內場)에 군중들이 모였다. 그들은 ‘조선독립’이 적힌 깃발을 앞세우고, 구한국 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전날 주문도에서 돌아온 유봉진은 말을 탄채 ‘결사대 유봉진’이 적힌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군중을 선동하기 위해 군청통 상점 앞의 큰 종을 울렸고, 이후 군청과 객사, 공자묘 순서로 행진하며 만세를 부르도록 인솔했다. 수천 명의 군중은 군청으로 가서 사무실 밖 정원에 나와 있던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라. 만약 응하지 않으면 군청 안으로 침입하여 파괴하겠다”고 위협하여 만세를 부르게 했다.

이어 객사(客舍)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공자묘에 집결했다. 이때 시위 군중은 무려 1만 명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강화경찰서에서 염이선(廉履善) 등 4명의 조선인 순사보가 출동하여 제지하자 그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며 구타했다.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군청으로 가서 군수 이봉종(李鳳鍾)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라고 강요하고, 만일 불응하면 군청을 파괴하겠다고 협박했다.

그는 다시 시위군중을 향교로 인솔하여 장터에서 체포된 유희철과 조기신(趙基信)을 석방시키기 위하여 경찰서 앞에서 시위하자고 제의하고, 오후 5시경 경찰서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그는 경찰서 건물을 파괴한다고 협박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과 장터에서 칼을 뽑아들고 진압하려 했던 조선인 순사보 김덕찬(金德贊)을 내보내라고 외쳐댔다. 상황이 위급하다고 판단한 일제 경찰은 결국 구금자를 석방했다.

1만 명이 넘는 군중들은 다시 읍내장으로 돌아왔다. 유봉진은 그들을 향해 “조선은 종래 민지가 낮았으나 현재는 독립할 정도가 되고 경성 기타에서도 이 운동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더욱이 이태왕 전하의 죽음은 병사가 아니고 독살이라는 풍설이 있다. 이것은 하늘이 명하는 바로 독립의 기운이 익어 가고 있으니 열렬한 운동을 해야 한다. 내일 정오까지 길상면 온수리에 모여 만세를 부르자”고 연설했다. 이에 군중들은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고 밤 11시경 해산했다. 

그러나 선생은 결국 체포되어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출판법·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만기 출소한 유봉진은 북도면 시도에서 사립 신창학교 교장으로 근무했고, 몇 해 뒤 강화군으로 돌아와 하도면 내리에 있는 폐교에 노산학원을 다시 개교해 2년 동안 근무하는 등 교육자로 지냈다. 1920년 9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그가 출소해 강화에 돌아왔을 때 환영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선생은 해방 이후에도 임시정부 강화 환영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는 등 강화 지역사회의 중심인물로서 꾸준히 활동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피고 유봉진은 야소교 북감리파 사장으로 일찍이 일한병합에 분개한 이래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던 자인데, 대정 8년(1919년) 3월 초순 손병희 등이 경성부에서 조선 독립을 선언하고 경성부 내에서 독립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을 들어 알고 그 취지에 찬동하고, 그의 소재지인 강화도에서도 동일한 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그달 6일경 야소교 목사 이진형, 황유부, 황도문 등과 협의한 후 그 계획을 하기로 하고 조상문, 유희철 등에게 그 통지를 하고 황유부, 황도문 등과 함께 그 운동 참가자 권유의 임무를 맡았다. 동월 18일 강화군 읍내 장날을 기하여 그 시장에서 만세를 크게 외치기로 하고 동월 16일 피고 유봉진은 단신으로 주문도로 가서 섬 주민에게 그 운동 참가를 권유하였다. 동월 18일 기르던 말을 타고 강화도 내를 달리고 그곳 종각에 올라 큰 종을 타명한 후 압수된 령 제15호-11인 ‘결사대 유봉진’이라고 적은 구한국 깃발을 휘둘렀다. 

<유봉진 선생의 1920년 3월 12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중>

지현성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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