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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복의 우리말 산책] 아름다운 순우리말 ‘여우비’

작성일 : 2023.07.12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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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여우가 시집 가는 날’ ‘호랑이 장가 가는 날’
우리 상상력과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우리말

꾀가 많은 여우는 어느 날 호랑이와 마주치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머리를 썼다. “내가 이 세상에서 힘이 가장 세다는 것을 호랑이 너는 아느냐. 나를 따라와 봐라. 그럼 알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가장 힘센 존재로 알고 있던 호랑이가 말했다. “에이, 그럴 리가 있나? 네 말대로 어디 한번 해보자, 그래.” 여우가 앞서가고 호랑이가 뒤를 따랐다. 정말로 모든 짐승이 겁을 먹고 도망치고 있었다.

온갖 여우짓으로 호랑이를 꾀어 결혼

호랑이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붙어 다니다 보니 어느새 여우한테 정이 들기도 했다. 여우는 한술 더 떠 호랑이와 함께 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랑이 옆에 있으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으니까(호가호위·狐假虎威: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림). 드디어 온갖 여우짓으로 호랑이를 꾀어 결혼하게 된다.

사실은 그동안 여우를 짝사랑해온 구름이 있었다. 바보같이 사랑을 제대로 고백해 보지도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만 보다 호랑이와의 결혼식을 지켜봐야 했다. 여우와 호랑이가 결혼하던 어느 맑고 화창한 날 구름은 애써 환한 미소를 보이며 눈물을 흘렸다.

짝사랑하던 구름이 서럽게 눈물 흘려

‘여우비’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름대로 구성한 것이다. ‘여우비’란 볕이 나 있는 날 잠깐 오다가 그치는 비를 말하며, 이런 날을 ‘여우가 시집가는 날’ 또는 ‘호랑이가 장가가는 날’이라고도 한다. 이런 말을 모두 충족시키려면 위의 구성이 그럴 듯하다.

‘여우’는 잔꾀가 많아 매우 교활한 사람(나쁜 뜻)이나 하는 짓이 깜찍하고 영악한 계집아이(좋은 뜻)를 비유적으로 일컫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된다. 주로 여자에게 쓰인다. “여우 같은 ×”이라고 하면 욕이 되지만, “아이고 저 여우”라고 하면 귀엽고 깜찍해 깨물어주고 싶은 심정을 담은 말이다. 여우 중에도 ‘불여우’(한국 북부와 만주 동부 지방에 사는 붉은 여우)가 가장 꾀가 많다고 한다.

‘여우볕’ ‘여우별’ 등도 아름다운 우리말

여우에 대비되는 말이 늑대다. 여자에게 엉큼하고 음흉한 마음을 품은 남자를 ‘늑대’라고 한다. 여우와 다른 점은 “아이고 저 늑대”라고 하면 필시 욕이다. 좋은 의미는 어디에도 없다. 꾀가 많은 여우가 늑대하고 결혼할 리는 없다. 호랑이를 선택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이런 얘기는 우리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다. ‘여우비’ 외에도 여우볕(비나 눈이 오는 날 잠깐 났다가 숨어 버리는 볕), 여우별(궂은 날 잠깐 났다가 사라지는 별)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단순히 여우처럼 약삭빠름에서 붙여진 낱말인 듯하다. ‘여우비’가 생기고 ‘여우 시집가는 날’ ‘호랑이 장가가는 날’이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요즘 장마철에 자주 내리는 ‘여우비’ 

어쨌든 아름다운 말들이다. ‘여우비’는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하는 그 자체도 아름답다. 인기 드라마였던 ‘여름향기’(2003)에서는 ‘여우비’를 중요 동기(모티브)로 해 여우비 속 두 주인공의 모습과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어릴 때부터 심장병을 앓아온 여자가 심장을 이식받은 후 이식받은 심장의 주인이 사랑했던 남자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이야기다. 아름다운 영상과 음악으로 많은 사람의 가슴에 남아 있는 드라마다.

요즘 장마철이다. 해가 나는 속에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런 비가 바로 ‘여우비’이며 이런 날이 ‘여우 시집 가는 날’ ‘호랑이 장가 가는 날’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잠시 내리는 비가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의 풍부한 상상력과 정서를 고스란히 간직한 이들 정겹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많이 사용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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