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6.28 11:06 수정일 : 2023.08.14 16:23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이자 공자상을 봉안한 가장 오래된 향교인 교동향교. <사진=바른언론>
강화에는 유교·불교·기독교 등 다양한 종교 유산들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유명한 곳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곳들이 많아 아쉬움이 컸다. 이에 강화의 종교유산을 소개하고 널리 알리고자 본 시리즈를 기획했다. 이번 호는 교동면 읍내리에 위치한 교동향교다.

▲홍살문을 지나 얕은 언덕길을 오르면 교동향교를 만날 수 있다. 우측 하단에 있는 비석은 하마비(下馬碑). <사진=바른언론>
교동향교를 방문하면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것은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서원이나 향교, 왕릉 등 격식을 갖추어야 할 곳에 만드는 문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홍살문 우측 하단에는 ‘수령변장하마비’라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수령과 변장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다.
지위가 높으나 낮으나 모두 공자를 모신 사당인 향교 입구에서는 말에서 내리라고 세운 게 하마비(下馬碑)인데, 강화 교동도에서 지위가 높은 수령과 변장(군사 지휘관)을 명시해둔 점이 조금 특이한 점이다.
홍살문을 넘어 감나무 길을 지나면 교동향교를 만날 수 있다. 화개산 자락에 위치한 교동향교는 여백이 아름다운 한 점 수묵화와 닮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향교이며, 인천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지정된 곳이다.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폐를 모셔져 있는 교동향교 대성전. <사진=바른언론>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며, 동시에 교육기관이다.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곳으로서 국가에서 세운 기관이다. 조선시대 1읍 1교를 내세우며 각 지방으로 확산했는데 이곳 교동향교 역사는 그보다 훨씬 빠르다.
교동향교는 고려시대인 1127년(인종 5년)에 창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로 1286년(충렬왕 12년)에 안향(安珦)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孔子像)을 들여와 교동향교에 처음으로 모셨다고 전해진다.
조선 1741년(영조 17년)에는 지부 조호신이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남쪽 기슭으로 옮겼다고 하며, 예전의 향교터는 지금의 고구리에 남아있으며 현재도 구향교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향교 안에는 공자의 신주와 우리나라 유현들의 위폐를 모신 대성전, 유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았던 명륜당(明倫堂)과 동재(東齋)·서재(西齋), 동무(東廡)ㆍ서무(西廡), 제수용품을 보관하는 제기고, 내·외삼문이 자리한다.

▲유생들의 교육공간이었던 명륜당. <사진=바른언론>
현재 교동향교 대성전에는 공자와 함께 맹자, 안자, 증자, 자사 등 4명의 성인을 모시고 있다.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자 18명(최치원, 설총,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김장생, 조헌,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 송나라 유학자 2명(정호, 주희) 등 총 스물다섯 명의 위패가 있다.
교동향교는 전성기의 향교건축 체제, 즉 내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서 무(廡)와 제기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제향공간과, 내삼문에서 명륜당 사이의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 재를 중심으로 하는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좌측 하단에 있는 것이 노룡암 각석. 깨져서 일부만 남아 있다. <사진=바른언론>
명륜당 뒤 축대 위에는 볼거리가 하나가 있는데 바로 ‘노룡암 각석’이다. 이 노룡암(老龍巖)은 원래 교동현 관아 동헌의 북쪽 층계에 있었던 돌로,
1717년(숙종 43년)에 충민공 이봉상(李鳳祥)이 ‘노룡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1773년(영조 49년)에 그의 손자 이달해(李達海)가 글을 지어 새겼던 것을 1820년(순조 20년) 통어사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쇄풍(虎距 巖將軍灑風,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는 7글자를 새겼다. 돌 아래쪽이 깨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1987년에 교동향교로 옮겨졌다.

▲명륜당 동쪽의 양반 자제 학생 기숙사인 동재. <사진=바른언론>

▲대성전에서 바라본 내삼문(좌)과 서무(우). <사진=바른언론>
명륜당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동재, 서쪽에는 서재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학생들의 기숙사였는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신분에 관계 없이 먼저 입학한 교생들은 동재를, 나중에 입학한 교생들은 서재를 사용했다고 했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신분을 구별하여 양반은 동재를, 평민은 서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음력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또 교동향교는 매주 토요일·일요일에는 방문객과 함께하는 체험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우리집 가훈 쓰기’와 ‘고유례 체험’이 그것인데 고유례는 국가나 개인이 중대한 일을 치른 뒤 또는 치르기 전에 그 내용을 사당이나 신명에 고하는 유가(儒家)의 의례를 말한다.
한정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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