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6.23 18:51 수정일 : 2023.06.23 18:58

▲1745년(영조 21년)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이 ‘안해루’다. <사진=바른언론>
(지난 호에 이어서) 오두돈대를 지나 광성보로 향했다.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였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닷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1658년(효종 9년)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졌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던 광성보는 미군의 포격으로 초토화됐었다.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별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광성보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기는 것은 ‘안해루’다. 안해루는 1745년(영조 21년)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만든 성문이다.

▲광성돈대 내부에 전시된 포(砲)들. <사진=바른언론>
원형의 광성돈대 안에는 당시에 사용하였던 대포(大砲)ㆍ소포(小砲)ㆍ불랑기가 복원되어 전시돼 있다. 사진상 우측에 있는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 포알은 화약이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강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중간에 있는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 포알은 대포와 같으나 대포는 조준이 안 되지만 소포는 조준이 가능하다. 좌측의 가장 작은 포는 불랑기라고도 하며, 프랑스군이 사용하였던 것이라 한다.

▲쌍충비의 모습. <사진=바른언론>
쌍충비각에는 향토유적 제10호로 지정된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하나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로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다.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됐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폭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됐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강화군에서도 당시 역사적인 교훈을 널리 알리고 비장한 마음으로 치열한 전투에 임해 전사한 어재연 장군과 휘하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4월 24일 광성보의 쌍충비각 앞에서 제사를 봉행하고 있다.

▲쌍충비각 옆에 마련된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 <사진=바른언론>
쌍충비각 옆에는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가 있다. 비문은 리선근이 짓고, 김충현이 비문을 써 1938년에 세웠다.
전면의 비명은 김충현의 글씨다. 후면의 비문은 리선근이 짓고 역시 김충현이 썼다. 두 비의 전면 비명은 한자로 썼으나 후면 비문은 정연한 궁체 정자로 또박또박 썼다. 그 앞에 서서 비문을 읽으니 당시의 무명용사들이 떠올라 절로 숙연해진다.

▲무명용사비 반대편 아래 쪽에 위치한 신미순의총. <사진=바른언론>
신미순의총은 신미양요 당시 장렬히 순국한 조선군의 시신들을 화장시켜 한 묘에 7~8인씩 함께 합장한 곳이다. 신원을 알 수 없었던 51인이 7기의 분묘에 나누어 합장되어 있다. 최후의 한 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살신호국 정신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용두돈대에 설치된 복원기념비. <사진=바른언론>
쌍충비를 지나 조금 걸으면 갈림길이 나온다. 우측으로 가면 손돌목돈대가, 좌측으로 가면 용두돈대와 광성포대가 나온다.
용두돈대는 강화해협을 따라 용머리처럼 돌출한 자연 암반위에 설치된 천연적인 요새였다. 용두돈대 중앙에는 1977년에 세워진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가 있는데 앞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 뒷면에는 이은상이 짓고 김충현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양옆으로는 그 당시에 사용하였던 홍이포(紅夷砲) 2문이 전시돼 있다.

▲손돌목돈대 전경. <사진=바른언론>
다시금 발길을 돌려 손돌목돈대로 향한다. 손돌목돈대는 신미양요 때 미군과 치열한 전투 벌였던 격전지로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구릉 정상부에 자리 잡고 있다. 본래 돈대 중앙에 3칸의 무기고가 있었고, 포좌 3개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용두돈대와 마찬가지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용두돈대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덕진진의 성문인 공조루(控潮樓). 신미양요 때 파괴되어 홍예문만 남은 것을 1976년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다. <사진=바른언론>
다음 목적지는 덕진진이다. 덕진진은 강화 12진보(鎭堡)의 하나이며 덕포진과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도 제1의 포대였다.
본디 수영(水營)에 속하여 첨사(僉使)를 두고 있었는데, 1666년(현종 7년)에 강화유수 서필원(徐必遠)이 임금에게 청하여 첨사를 경기 김포시 덕포로 옮기고 이곳에 별장을 두었다. 1677(숙종 3년)에는 유수 허질(許秩)이 임금에게 청하여 만호(萬戶)로 승격시켰다. 1874년(고종 11년)에 축조한 남장 포대는 15문의 포대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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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진돈대(상)와 남장포대(하). <사진=바른언론>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梁憲洙)의 부대가 밤의 어둠을 타서 이 진을 거쳐 삼랑성(三郞城: 일명 정족산성, 鼎足山城)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J.로저스 중장이 이끄는 미국 극동함대와 이곳에서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초지진(草芝鎭)에 상륙한 미국해병대에 의하여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때 성첩(城堞)과 문루(門樓)가 모두 파괴되고, 문루터만 남게 되었다. 1976년에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墩臺)를 보수하였으며 남장포대도 개축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1867년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덕진첨사가 설치한 해문방수비(향토유적 제9호). <사진=바른언론>
‘바다의 척화비’라고도 불리는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는 1867년에 대원군의 명으로 덕진첨사가 건립한 높이 147cm 너비 54.5cm 두께 28cm 비(碑)다. 비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각인돼 있으며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포가 설치된 초지진 내 전각. <사진=바른언론>
호국돈대길의 종착지는 초지진이다. 초지진은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이후 허물어져 돈대(墩臺)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던 것을 1973년 강화전적지 보수정비사업 때 초지돈대만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래 초지진에는 군관 11인, 사병 98인, 돈군 (墩軍) 18인, 목자(牧子) 210명 등이 배속되어 강화해협을 수비하였다. 또한 초지돈(草芝墩), 장자평돈(長子坪墩), 섬암돈(蟾巖墩) 등 세 곳의 돈대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들 돈대와 본진간의 협공체제를 통해 수비력을 극대화하였다고 한다.
또한 초지진에는 군선(軍船) 3척이 배속되어 있었고, 부속된 3곳의 돈대에는 각각 3개의 포좌(砲座)를 마련하고 화포를 설치하여 강화 해협을 수비하였다.
그러던 중 1871(고종 8년) 신미양요 때 미군함 모노카시호와 팔로스호 등의 포격과 미국 해병 450명의 상륙공격으로 초지진이 미군에 점령되면서 군기고(軍器庫), 화약고, 진사(鎭舍)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고 전해진다. 1875년(고종 12년)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의 포격으로 또다시 초지진이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듬해인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문호가 개방된 이후 방치되어 허물어지고 말았다.
현재 초지진의 진사와 주요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음식점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서 축조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초지돈대는 높이가 4미터 정도이고 장축이 100여 미터 되는 타원형의 돈대인데, 내부에는 3군데의 포좌(包座)와 총좌(銃座) 100여 개가 있으며, 조선시대 대포 1문이 전시되어 있다. 초지진은 1971년 12월 28일 사적 225호로 지정되었다.
호국돈대길은 힘없는 나라의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내야 했던 절망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켜낸 선조들의 피와 땀이 녹아 있는 호국돈대길을 걸으며 호국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길 추천한다.
남기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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