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6.12 16:30

▲강화나들길 2코스인 호국돈대길. <사진=강화군>
1코스에 이어 2코스 호국돈대길 투어를 시작했다. 1코스 종점이자 2코스 기점인 갑곶돈대는 이미 지난 호에서 소개했기 때문에 생략하고 용진진으로 향했다.
▲좌강돈대 성벽에서 바라본 바다. <사진=바른언론>

▲복원된 좌강돈대의 모습. <사진=바른언론>
용진진은 군대가 주둔하던 군사시설로써 1656년(효종 7년)에 쌓았다. 원래 병마만호(종4품) 1명, 군관 24명, 사병 59명, 돈군 18명 등 총 102명의 병력이 주둔하였으며, 가리산돈대·좌강돈대·용당돈대 등 3개의 돈대를 관리하였다.
포를 놓는 자리인 포좌 4문, 총을 놓는 자리인 총좌 26개소의 시설물이 있었으나 석축 대부분은 남아 있지 않다. 출입구였던 홍예문 두 곳만 남아 있었는데 1999년에 그 위로 새로이 누각을 세워 복원하였다.
▲용당돈대의 모습. 군사들이 상주했었기 때문에 그들이 기거할 작은 건물과 창고(무기고)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현재는 건물터의 흔적만 남았다. <사진= 바른언론>
용당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9개 돈대중 하나로 가리산돈대·좌강돈대와 함께 용진진에 소속되어 있다. 4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건물지가 남아있다.
▲화도돈대 전경. 1월 1일에는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는 일출 명소이기도 하다. <사진=바른언론>
화도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49개 돈대 중 하나다. 절벽쪽으로 장축을 기대고 있는 면의 길이가 35m이고, 다른 면은 32m로 한 면이 약간 짧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다. 성벽의 석축은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성벽의 뿌리는 어느 정도 남아 있다. 돈대의 남쪽 아래에는 고려회성을 가로지르는 물길을 건너 화도 수문이 있다. 2002년 발굴 조사를 거쳐 복원 정비되었다.

▲오두돈대 근처에 조성된 황톳길. 맨발로 흙을 느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사진=바른언론>
▲오두돈대의 모습. <사진=바른언론>
오두돈대(鼇頭墩臺)는 화도돈대와 마찬가지로 1679년(숙종 5년)에 강화도 해안방어를 목적으로 쌓은 돈대 중 하나로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자라의 머리와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잇으며 평면 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달한다. 돈대 동남쪽으로는 오두정지(鼇頭亭址)와 강화전성이 위치한다.
그런데 왜 숙종 때 강화도에 많은 돈대를 만들게 되었을까? 원인은 당시 주변 정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을 때는 아직 병자호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때다.
때문에 숙종은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굳건히 방비할 것을 주문했다. 이때 영의정 허적의 청을 받아들여 강화도에 돈대를 쌓기로 결정하게 되었고, 1678년 11월 4일에 강도설돈처소별단(江都設墩處所別單)을 반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병조판서 김석주가 올린 후록에 돈대의 형태와 규격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돈대의 수를 49개소로 정하고 돈대의 제도는 산이 있는 곳은 산을 따라 성첩(城堞)을 만들며, 평지에 성을 쌓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높이를 3장(丈)으로 하고, 그 두께의 밑넓이는 3장 5척으로 하며, 면(面)의 넓이를 2장 5척으로 한다. 치첩은 높이 6척, 두께 3척, 길이 9척으로 하고 전면에 포혈(砲穴) 2개소, 좌우에 포혈 각 1개소로 하고, 주위를 4면 10칸(間) 기준으로 하되 그 지형에 따라 방형(方形) 또는 원형, 일직선 또는 ㄷ 자형으로 하며 파수병이 많아야 할 긴요한 지역의 경우는 성의 제도를 알맞게 크게 한다”
돈대를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석수들이 강화도로 모이기 시작한 날이 1678년 음력 12월 4일이다. 돈대를 쌓기 위해서는 많은 석재가 필요했다. 많은 석재는 강화도와 인근 섬에서 공급해 오면서 큰 어려움이 없었다. 섬에서 배를 이용해 실어 나르는 운반팀도 있었다. <비변사등록>에 의하면 석수가 400여 명, 대장장이가 50여 명에다 그들을 돕는 잡부들까지 총 1,400여 명이 강화도로 왔다. 이뿐만 아니고 다듬은 돌을 섬에서 운반하기 위한 배도 75척이고, 배를 운영하는 뱃사공과 이를 돕는 격군도 2명씩 해서 220여 명이 함께 도착하였다. 돈대 쌓기에 앞서 돌을 깨고 나르는 데 만도 1,600명 이상의 사람이 작업을 하였다. 총인원 15,000여 명이 80여 일 만에 쌓은 대공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오두돈대도 그때 축성된 돈대다. 그러나 신미양요로 인해 돈대는 무참히 부서지고, 허물어지면서 손을 쓸 수 없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남기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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