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5.22 17:13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관용구 가운데는 구체적인 뜻을 모르고 쓰는 표현 많아
‘시치미’는 매에 다는 꼬리표, ‘산통’은 점칠 때 쓰는 통
‘시치미를 뗐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등처럼 구(句) 형태로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 있다. 관용구 또는 관용 표현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체로는 의미를 알지만 ‘시치미’ ‘도무지’와 같이 하나씩 뜯어 놓고 보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미 삼아 이들의 어원을 따져 봤다. 이 중에는 언어학적 방법이나 사실을 바탕으로 분석이 가능한 것이 있지만 민간 속설에 의지해 그럴 것이라 짐작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도 있다.
1. 시치미를 뗀다
“정말 몰랐다고 시치미를 떼고 있다”처럼 쓰이는 ‘시치미’는 매에 다는 꼬리표를 가리킨다. 몽골의 지배를 받던 고려시대에는 매사냥이 성행했다고 한다. 당시 궁궐은 물론 귀족 사회까지 매사냥을 즐기다 보니 길들인 매를 잃어버리는 일이 잦았다. 이 때문에 매에 꼬리표를 달아 표시했는데 이것을 ‘시치미’라 불렀다. 이 시치미를 떼면 누구의 매인지 알 수 없게 되므로 ‘시치미를 떼다’는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알고도 모른 체하는 사람이나 하고도 안 한 척하는 사람에게 쓰는 말이다.
2. 산통을 깬다
“산통을 깬다”는 말도 자주 쓰인다. ‘산통(算筒)’은 장님이 점을 칠 때 쓰는 산가지(셈을 세는 막대기)를 넣은 통을 이르는 말이다. 산통에 들어 있는 산가지를 뽑아 점괘를 풀었는데 이 산통을 깨 버리면 장님은 먹고살 일이 막연해진다. 그래서 ‘산통을 깨다’는 바라지 않은 일이 발생해 다 잘 돼 가던 일이 뒤틀리는 경우를 나타내는 말로 쓰이게 됐다.
3. 터무니없다
“터무니없는 사실에 놀랐다”처럼 쓰이는 ‘터무니’는 터를 잡은 자취를 뜻한다. 집이나 건축물을 헐어도 주춧돌이나 기둥 등과 같은 흔적, 즉 터무니는 남아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터무니 없다’는 집이나 건축물을 세웠다는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즉 정당한 근거나 이유가 없다는 의미가 된다. 내용이 허황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4. 도무지 알 수 없다
“도무지 알 수 없다”에서 쓰이는 ‘도무지’의 옛말은 ‘도모지’다. 사사로이 행해지는 형벌인 사형(私刑)으로, 조선시대에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몇 겹으로 발라 숨을 못 쉬어 서서히 죽게 하는 형벌인 ‘도모지’가 있었는데 이것에서 ‘도무지’가 유래했다고 본다. 그 형벌만큼이나 도저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에서 ‘도모지’가 쓰였고, ‘도무지’로 변했다는 것이다.
5. 용빼는 재주
“무슨 용빼는 재주라도 있나”라고 할 때 ‘용빼다’의 ‘용’은 새로 돋은 사슴의 연한 뿔을 가리키는 ‘녹용’의 준말이다. 살아 있는 사슴의 머리에서 녹용을 빼낼 때는 날랜 솜씨가 필요한데 이런 기술을 ‘용빼는 재주’라 한 것이다. ‘용빼는 재간’으로도 쓰이며 남다르게 큰 힘을 쓰거나 재주를 지닌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6. 어깃장을 놓다
“어깃장을 놓았다”에서 ‘어깃장’은 대문이나 부엌문 등을 짤 때 문짝이 일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붙인 띠 모양의 나무를 가리킨다. 쉽사리 비틀어지거나 휘어지지 않게 대각선으로 붙인 어깃장의 모양에서 착안해 어떤 일을 어그러지게 하거나 바로 되지 못하게 훼방 놓는 것을 ‘어깃장을 놓는다’고 했다고 한다.
7. 말짱 도루묵
“말짱 도루묵이 됐다”고 할 때 ‘도루묵’은 생선 ‘도로묵’에서 온 것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길에 생선을 먹었는데 별미여서 이름을 물으니 ‘묵’이라고 했다. 맛에 비해 이름이 보잘것없어 ‘은어(銀魚)’라 부르도록 명했으나 나중에 궁중에 돌아와 다시 먹으니 예전과 달리 맛이 없었다. 그래서 “은어를 도로 묵이라고 해라”고 일렀다. 이렇게 해서 ‘도로묵’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발음이 변해 ‘도루묵’이 됐다고 한다. 아무 소득 없는 헛된 일이나 헛수고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8. 어처구니가 없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처럼 쓰이는 ‘어처구니’는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이나 사물’을 뜻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러나 ‘없다’와 어울려 ‘뜻밖이어서 몹시 기가 막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어처구니’가 바윗돌을 부수는 농기계의 쇠로 된 머리 부분 또는 맷돌을 돌리는 나무막대로 만들어진 손잡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9. 어안이 벙벙하다
“어찌 된 일인지 어안이 벙벙하다”와 같이 사용되는 ‘어안’ 역시 사전엔 ‘어이없어 말을 못하고 있는 혀 안’이라고 돼 있지만 ‘벙벙하다’가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다는 뜻이므로 서로 의미가 잘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안’을 ‘정신’을 가리키는 말로 보기도 한다. ‘어안이 벙벙하다’와 함께 ‘어안이 없다’는 표현도 쓰이므로 ‘어안’을 ‘정신’으로 해석하면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10. 을씨년스럽다
“날씨가 몹시 을씨년스럽다”처럼 쓰이는 ‘을씨년’은 1905년 ‘을사년’에서 온 말이다. 국권을 빼앗긴 을사조약으로 온 나라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인 이후로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는 표현을 쓰게 됐고 차츰 ‘을씨년스럽다’로 변했다고 한다.
11.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세상물정 모르고 철없이 함부로 덤비는 경우를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서 ‘하룻강아지’는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강아지를 일컫는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룻강아지’는 날짜를 세는 ‘하루’와는 관계가 없다. ‘하룻강아지’는 ‘하릅강아지’가 변한 말이다. 즉 ‘하릅+강아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하릅’은 짐승의 나이를 셀 때 사용하는 말로, 나이가 한 살 된 소·말·개 등을 이르는 낱말이다.
한 살 된 강아지가 ‘하릅강아지’고 이것이 변해 ‘하룻강아지’가 됐다. 그러니까 ‘하룻강아지’는 하루가 아니라 한 살짜리 강아지다. 하릅망아지·하릅송아지·하릅비둘기 등도 하릅강아지처럼 한 살짜리 동물을 일컫는 말이다. 짐승의 나이를 셀 때 사용하는 말로는 ‘하릅’ 외에 ‘두릅’ ‘사릅’ ‘나릅’ 등이 있다. 각각 두 살, 세살, 네 살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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