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5.22 16:57
▲강화나들길 1코스 중 하나인 은수물. 은수물을 지나 북산을 오르면 북문산성으로 갈 수 있다. <사진=바른언론>
강화향교를 지나니 ‘은수물’이 나온다. 빨래터 겸 약수터인 ‘은수물’은 은가루를 풀어놓은 듯 은빛을 띤다 해서 ‘은수물’이라 불린다고 한다. 강화향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이 물을 길어다 썼다고 한다. 우물 아래쪽에 빨래터가 만들어져 있는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수도시설이 생기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였다 전해진다.
▲북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강화산성 북문’. <사진= 바른언론>
은수물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강화산성 북문이 나온다. 더위를 피해 나들이 온 방문객들이 여럿 보인다. 북문은 고려 고종 19년(1232)에 강화로 천도한 뒤 대몽 항쟁을 위하여 축조한 내성(당시 토성)에 연결되었던 문이다. 내성은 개경환도와 동시에 헐리고 조선 초기에 토성으로 개축하였으나,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때 대부분이 파괴되었던 것을 효종 3년(1652)에 일부를 개축하였다.
숙종 3년(1677)에 유수 허질이 전면을 돌로 쌓고 후면은 흙으로 개축 확장하기 시작하여 숙종 37년(1711)에 유수 민진원이 34년 만에 완성하였는데 주위가 1,947m, 치첩이 1,813개소이며 4대문과 4소문, 2개의 수문, 9개의 성곽, 4개의 성문장청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북문은 누각이 없었으나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세우고 진송루라 일컬었으며, 동문은 망한루, 서문은 첨화루, 남문은 안파루라 하였다. 그 뒤 북문 누각은 병화(전쟁)로 헐리고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했다고 한다.
▲북장대 터에서 바라본 강화 전경(上)과 오읍약수터의 모습. <사진=바른언론>
북문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북장대 터가 나온다. 강화산성에는 남산, 북산 그리고 서문 부근 3곳에 장대(전쟁 시 군사 지휘에 용이한 곳에 설치한 장군의 지휘소)를 세워놓았다고 전해지는데 모두 허물어진 것을 2010년 남장대만 복원해 북장대는 그 터만 남아있다.
북장대 터에서 길을 따라 내려오면 오읍(五泣) 약수터를 만날 수 있다. 고려 고종 때 북문 건축 시 기우제를 올려 하늘에서 내려주었다는 약수다. 몽골군대가 이 땅을 침략하였을 때 고려 고종은 강화도로 옮겨 끝까지 싸우고자 하였다.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해 1232년 2년간에 걸쳐 내성과 궁궐, 관아를 건축하였다. 북문을 건축하던 중 날이 가물어 갈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고종은 북문 앞에 제단을 쌓고 기우제를 올렸는데, 하늘이 어둡기 시작하고 천둥이 쳤다고 한다. 바로 그때 벼락이 큰 바위에 떨어지며 물이 솟았는데 바로 지금의 약수다. 이날 하늘과 땅, 신, 왕, 백성이 울었다 하여 ‘다섯오’에 ‘울 읍’자를 써 오읍(五泣)약수라 불렀다고 한다.
▲연미정의 모습. 좌측의 느티나무는 2019년 9월 제13호 태풍(링링)에 의해 부러진 보호수다. <사진=바른언론>
숲길을 나와 차도를 걷다 보나 각종 야생화와 나무들이 나들길 관광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월곶리 마을회관을 지나 조금만 더 걸으면 연미정이 자리한 월곶진이 나온다.
월곶진은 한강하구에 위치해 염하를 통하여 인천 방면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었고, 중국과도 교통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매우 번성한 포구 중 하나였다고 전해진다. 연미정(燕尾亭)은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 서해와 인천으로 흐르는 물길 모양이 제비 꼬리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강화 10경의 하나로도 손꼽히는 연미정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고종 31년(1244)에 구재학당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공부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연미정은 정묘호란 때 인조가 후금과 굴욕적인 형제 관계의 강화 조약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 20년(1744)에 중건되었으며, 조선 고종 28년(1891)에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이제 연미정을 나와 갑곶돈대로 향한다. 옥개방죽을 걸으면서 해안선 따라 길게 늘어선 철책을 바라보니 분단의 아픔을 다시금 실감한다.
옥개방죽은 강화읍 옥림리 옥개에 자리 잡은 방죽(물을 막기 위해 쌓은 둑)인데 저어새와 황로 등 철새가 자주 오는 곳이다.
▲갑곶순교성지(上)와 갑곶돈대의 화포. <사진=바른언론>
최종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갑곶순교성지는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 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이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되면서 미국 함대에 왕래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목이 잘려 효수된 곳이다.
천주교 인천교구는 문헌상에 나와 있던 갑곶 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 그 터를 매입한 후 2000년에 순교성지로 조성하였고, 2001년 9월에는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한 박순집의 묘를 이장하였다. 박순집은 참수 희생자는 아니지만 목숨을 걸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안장하고, 순교자의 행적을 증언하였으며 성직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갑곶 순교성지는 순교자 묘역과 박순집의 묘, 예배당, 야외 제대, 십자가의 길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갑곶돈대는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 것에서 갑곶이란 이름이 유래됐다고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갑곶돈대는 고려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조선 인조 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돈대로 숙종 5년(1679)에 축조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병인양요 때 프랑스의 극동 함대가 6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10월에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은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게 패하여 달아났다. 1977년에 옛터에 새로이 옛 모습을 되살려 보수, 복원이 이루어졌다. 지금 돈대 안에 전시된 대포는 조선시대 것으로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왜적의 선박을 포격하던 것이다.
이로써 강화나들길 1코스인 심도역사문화길을 모두 돌아봤다. 돌이켜보면 심도역사문화길은 고려시대의 임시수도로서 도서지역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강화산성, 고려궁지, 용흥궁, 강화성공회 한옥성당과 연미정 등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고향 같은 길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향 같은 이 길을 걸어봤으면 한다.
1코스가 마무리됐으니 다음 호부터는 2코스인 호국돈대길을 독자들께 소개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남기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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