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4.03 16:42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십팔번’은 일본의 대중 연극 가부키에서 나온 말
우리말로는 ‘장기’ ‘애창곡’ ‘단골노래’ 등이 적절
우리 민족은 예부터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즐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남조(南朝) 송(宋)의 범엽(范曄:398~446)이 편찬한 『후한서(後漢書)』 ‘동이(東夷)열전’은 2000여 년 전 부여·고구려 등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적은 것이다. 여기에는 서문에 "동이족들은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한다(憙飮酒歌舞)”고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부여(夫餘)조에는 구체적으로 “길에 사람이 밤낮없이 다니는데, 노래하기를 좋아해서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好歌吟 音聲不絶)”고 전하고 있다. ‘고구려’조에서도 “그 풍속은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데, 밤에는 남녀가 떼 지어 노래 부른다(群聚爲倡樂)”고 적고 있다. 진(晋)의 진수(陳壽:233~297)가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동이열전’ 등 다른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우리 민족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노래하기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한다. <이덕일 '고금통의'>
우리 민족에겐 음주가무 DNA 있어
이처럼 우리 민족은 다른 어떤 민족보다 음주가무를 즐겨 왔다고 한다. 이러한 우리의 문화적 유전자(DNA)는 지금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늘 회식과 함께 술과 노래를 즐기고 있으며 깊은 밤에도 유흥가는 떠들썩하다. 모여서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면 으레 노래방으로 이동해 한 곡조 뽑는 것이 관례처럼 돼 있다. 심지어는 혼자서도 노래방을 가는 사람이 있다. 이를 위한 것이 1인 노래방이요, 소위 코인 노래방이다. 이와 같이 노래방에 가 노래를 하게 되면 늘 부르는 자신만의 노래가 있게 마련이다.
그 노래가 특별히 좋아서일 수도 있지만 자기 목소리의 음역과 잘 어울리고 무언가 자신의 매력을 남에게 보이기에 적당한 노래여서 늘상 부르는 곡이 있다. 이를 보통 '십팔번'이라 한다. "십팔번 한번 불러봐" "너는 십팔번이 뭐야" 등처럼 쓰인다. 이처럼 '십팔번'이란 말이 많이 쓰이는데 정확하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어디에서 온 말인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십팔'이라고 하면 '시*'처럼 욕같이 들릴 수도 있어 혹 이것이 욕과 무슨 연관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십팔번'의 어원은 엉뚱한 곳에 있다. 일본의 대중 연극 가부키(歌舞伎)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약 400년의 전통을 가진 가부키는 여러 장(場)으로 구성돼 있다. 장이 바뀔 때마다 간단한 막간극을 공연한다. 17세기 무렵 이치카와 단주로라는 배우가 가문에서 내려오는 가부키 단막극 중에 크게 성공한 열여덟 가지 기예(技藝)를 정리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광언(狂言·재미있는 희극) 십팔번(十八番)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십팔번은 일본 사람들이 가장 높이 평가하는 희극이며, 점차 자랑으로 하는 일에 '십팔번'이란 말을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흔히 쓰이게 됐다. '단골 노래' ‘애창곡’ '장기(長技)' 등 우리말로 순화해 쓸 수 있는 용어다.
‘가라오케’는 ‘가라+오케스트라’ 합성어
노래와 관련해 종종 쓰이는 용어 가운데는 '가라오케'가 있다. 노래 반주 또는 그런 업소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가라오케’는 어디에서 온 말일까? 이 역시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일본어로 '비어 있다' 또는 '가짜'를 뜻하는 '가라(から: 空)'에 관현악단을 뜻하는 영어 '오케스트라(orchestra)'가 합쳐져 생긴 말이다. 1980년대 유흥가 주점을 중심으로 이런 형태의 업소가 우리나라에도 급속히 퍼졌다. 지금도 '가라오케'라는 업소 간판을 종종 볼 수 있다. '가라오케'는 우리말로 '녹음 반주' 또는 '노래방'으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
이 밖에도 일본에서 온 말이 쓰이는 곳은 많다. 노래방에 가기 전에 횟집이나 일식집에서 회식을 했다고 가정해 보자. “사시미 한 사라 하지 뭐” “무슨 사시미를 시킬까?” 등처럼 생선회를 가리켜 ‘사시미’라 부르는 사람이 꽤 있다. ‘사시미(さしみ, 刺身)’는 생선회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사시미 칼’은 생선회를 뜨는 칼을 의미한다. ‘사라(さら)’는 접시를 뜻하는 일본어다,
횟집에 가면 이왕이면 밑반찬이 많이 나오는 집이 좋다. 이때 밑반찬을 ‘쓰키다시’라 부르는 사람도 많다. ‘쓰키다시’의 양과 질적 수준이 횟집을 고르는 하나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쓰키다시(つきだし)’는 일본 요리에서 본요리 전에 나오는 일종의 전채를 가리키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은 ‘곁들이 안주’로 바꿔 쓸 것을 권하고 있다.
‘스시’는 ‘초밥’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
횟집이나 일식집에는 ‘스시’도 있다. ‘스시(すし)’는 소금·식초 등으로 간을 한 밥 위에 얇게 저민 생선·김·달걀 등을 얹거나 말아 만드는 일본 요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스시 테러’ 사건이 있었다. 회전초밥 체인점 등에서 손님이 비위생적인 행위로 초밥에 테러를 하는 행위가 담긴 영상을 SNS에 올려 음식점 위생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스시’는 우리말로는 상황에 따라 ‘초밥’이나 ‘생선초밥’ 등으로 부르면 된다.
생선회를 먹을 때 빠지지 않는 게 ‘와사비’다. ‘와사비(わさび)’는 매운맛을 내는 일본의 대표적 향신료다. 국어원은 우리말 대체어로 ‘고추냉이’를 선정했다. 생선회를 먹은 다음에는 탕으로 마무리하는 게 깔끔하다. 이럴 때 매운 것을 먹지 못하는 사람은 ‘지리탕’을 시키면 된다. 여기에서 ‘지리(ちり)’는 생선·두부·채소 등을 냄비에 넣어 맑게 끓인 국을 지칭하는 일본어다. 국어원이 제시한 순화어는 ‘맑은탕’ ‘싱건탕’이다.
이 외에도 음식과 관련해 쓰이는 일본어나 일본식 표현이 적지 않다. 사라다(→샐러드), 락교(→염교), 아나고(→붕장어), 마구로(→다랑어), 소바(→메밀국수), 샤브샤브(→전골), 다시(→맛국물), 다대기(→다진 양념), 다마네기(→양파), 오뎅(→어묵), 앙꼬(→팥소), 엑기스(→진액), 낑깡(→금귤), 와리바시(→나무젓가락) 등이 있다.
최신 HOT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