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3.01.17 19:36 수정일 : 2023.01.17 19:38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까치 설날’은 ‘아치 설날’에서 유래
‘아치 설날’은 섣달 그믐의 작은 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1924년 윤극영 선생이 작사·작곡한 ‘설날’ 노래다.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국인과 함께해 온 주옥같은 동요라 할 수 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때는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기였다. 그 시절에 아마도 우리 국민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 치하 민족의 한을 달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도 설이 돌아올 때마다 이 노래를 떠올릴 만큼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되뇌면서 문득 왜 ‘까치 설날’이라 하는지, 그리고 왜 까치 설날이 ‘어저께’라고 하는지 궁금해진다.
‘까치 설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민속 연구의 권위자였던 고(故) 서정범 교수의 주장이다. 그에 따르면 원래 섣달 그믐날은 ‘아찬 설’ 또는 ‘아치 설’이라 불렸다. ‘아찬’ ‘아치’는 순우리말로 ‘작은(小)’을 뜻한다. 그래서 설 전날을 ‘작은 설’이라는 뜻으로 ‘아치 설’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추석을 ‘한가위’라 불렀던 것과 마찬가지로 큰 설은 ‘한설, 한첫날’로, 작은 설은 ‘아찬 설, 아치 설’로 불렀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치’가 음이 비슷한 ‘까치’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까치 설날이 ‘어저께’라는 것은 ‘아치 설’이 섣달 그믐날, 즉 음력 12월 31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날의 바로 전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까치 설날은 어저께’ ‘우리 설날은 오늘’이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아치 설’인 섣달 그믐날 해가 저물면 친척들에게 ‘묵은세배’를 드리기 위해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이날 거리마다 등불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기 직전에 한 해 동안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이었다.
이날은 ‘눈썹 세는 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날 밤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해서 잠을 자지 않고 여러 놀이를 하면서 보냈다. 섣달 그믐날은 한자어로는 제야(除夜) 또는 수세(守歲)라고 한다. 요즘은 이날 밤 서울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 타종 행사가 열린다. 물론 오늘날 제야의 종 타종 행사는 음력이 아닌 양력 12월 31일 밤에 열린다(‘제야의 종’에 관해서는 제54호에서 다룬 바 있음).
윤극영 선생이 ‘까치까치 설날은~~’ 노래를 만든 시기인 일제 당시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일제는 우리의 문화와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온갖 짓을 저질렀다. 설날도 마찬가지다. 설날은 원래 음력 1월 1일로, 우리는 오래도록 이날에 설을 지내 왔다. 하지만 일본 식민통치가 본격화하면서 일제는 우리 명절을 부정하고 일본 명절만 쇠라고 강요했다. 특히 우리 ‘설’을 ‘구정’(옛날 설)이라 깎아내리면서 일본 설인 ‘신정’(양력 1월 1일)을 쇠라고 강요했다. 이때부터 ‘신정(新正)’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구정(舊正)’이라는 일본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일제는 (음력)설을 쇠지 못하게 1주일 전부터 방앗간 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일본 명절인 양력설을 쇠게 했다. 우리 국민은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 부르면서 음력설을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고수했다. 당시 일제의 강압에 맞서 “양력설을 쇠면 친일매국, 음력설을 쇠면 반일애국”이란 구호를 외칠 만큼 설 명절에 대한 우리의 의식은 깊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을 들어 일부에서는 ‘까치 설날’이 일본 설날(양력 1월 1일)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까치 설날’ 묵은세배, ‘우리 설날’ 신년 세배
앞서 얘기한 대로 ‘아치 설날’ 즉 섣달 그믐날 밤에는 ‘묵은세배’를 하고 다음 날인 설날 아침에는 신년 세배를 드리는 것이 설날 세시풍속이다. 그러나 요즘은 묵은세배는 생략하고 설날에 차례상을 물린 뒤 맨 웃어른에게 먼저 세배를 드리고 그다음 어른 순서대로 세배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과거에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세배를 올리기 위해 동네를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어르신들에게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는 세배를 올리면 어른들은 덕담을 하면서 술과 음식을 내어놓고는 했다. 보통은 어른들 앞에서 술을 마시지 않지만 설날에는 이해를 해주는 편이어서 이집 저집 세배를 다니다 보면 술에 거나하게 취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설날엔 세뱃돈이 최고
요즘은 설날에 연세 드신 부모님께 돈봉투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모님은 손자손주·조카 등에게 세뱃돈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미리 부모님께 이에 필요한 돈을 드리는 것이다. 아이들은 설날이 되면 세뱃돈을 얼마나 많이 받을까 나름대로 계산하며 기대를 하곤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 아이들이 세배를 하면 공부를 잘 하라거나 더욱 건강하라는 덕담을 하면서 세뱃돈을 건넨다.
설에 돈을 주는 풍습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세뱃돈이 일반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부터라고 한다. 특히 1970, 8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면서 세뱃돈이 설 대표 풍속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세뱃돈으로 이왕이면 빳빳한 신권을 주기 위해 시중은행 영업점을 찾는 사람도 적지 않다.
떡국을 먹는 것은 장수 기원하는 의미
예전의 설날에는 방앗간이 무척이나 붐볐다. 설날이 다가오면 시골 방앗간에서 떡 찌는 구수한 냄새가 온 동네를 감쌌다. 요즘에야 가래떡이 흔하지만 옛날에는 설날에만 가래떡을 볼 수 있었다. 설날에만 떡국을 먹을 수 있다 보니 떡국이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제일 큰집부터 내려오며 제사를 지내다 보니 떡국을 몇 그릇이나 먹게 되기도 했다. 설날에 떡국을 먹는 것은 떡국에 사용하는 긴 가래떡처럼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고 한다.
떡은 끊기지 않고 길게 뽑을수록 좋다고 해 가급적 길게 뽑았다. 긴 가래떡을 동그란 엽전 모양으로 썰면서 엽전이 불어나듯 재산이 불어나길 바랐으며, 엽전 모양의 떡국을 먹으면서 재물이 풍족해지길 기원했다고도 한다. 조선 후기에 지어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떡국의 겉모양이 희다고 해서 ‘백탕(白湯)’, 떡을 넣고 끓인 탕이라고 해서 ‘병탕(餠湯)’이라 불렀다는 기록이 나온다. 옛사람들은 병탕을 몇 사발 먹었느냐고 하면서 나이를 물었다고 한다. ‘떡국 먹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는 말이 이때 이렇게 생겨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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