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12.05 16:55
작성자 : 배상복

<배상복 작가 / 前 국립국어원 표준어 심의위원>
‘망년회’는 한 해를 잊는 모임이란 뜻의 일본식 표현
한 해를 보낸다는 의미의 우리식 ‘송년회’로 불러야
2022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코로나19 방역이 완화되면서 올해는 연말 모임 소식이 몇 개 날아들었다. 예전처럼 모임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가지 모임이 잡혀 있다. 코로나19에 경제적 한파까지 여러모로 분위기가 가라앉아 그리 즐거운 마음은 아니지만 직장 동료나 친구·동창끼리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을 나누는 일을 피해가긴 어렵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사람들과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친목을 다지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연말 모임은 한 해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함께 가지면서 사람들 간의 친목을 공고히 하는 데 의미가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 등 여러 가지로 연말 분위기가 무겁지만 대한민국 축구가 카타르 월드컵에서 어려운 확률을 뚫고 16강에 진출함으로써 그나마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연말 모임을 ‘망년회’라 많이 부른다. ‘망년회(忘年會)’의 ‘망년’은 망년지교(忘年之交) 또는 망년지우(忘年之友)에서 온 말이다. 나이를 따지지 않고 사귀는 벗을 망년지교(망년지우)라 한다. 인품이 훌륭한 사람이 있으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서로 친구로 사귄다는 뜻이다. 중국 당나라 때 이연수(李延壽)가 지은 역사책 ‘남사(南史)’의 ‘하손편’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망년회’는 술로 흥청대는 일본의 풍속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섣달 그믐께 친지끼리 모여 술과 춤으로 흥청대는 세시민속(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망년지교’ 또는 ‘망년지우’에서 글자를 따 이를 ‘망년(忘年)’ 또는 ‘연망(年忘)’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것이 망년회의 뿌리가 됐다. 하지만 ‘망년지교’나 ‘망연지우’의 ‘망년’과는 의미가 많이 다르다. ‘망년회’를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한 해(年)를 잊는(忘) 모임(會)’이란 뜻이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면서 한 해를 잊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일본식의 ‘망년회’가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우리 풍속인 양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구한말 신문에 ‘망년회’라는 기록이 처음 나오며, 1907~1910년에 발행된 ‘대한매일신보’에는 망년회가 일상생활이 됐음을 알 수 있게 하는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 ‘○○망년회’ 등의 제목으로 고위층들의 망년회와 관련한 소식을 전하는 기사가 다수 있는데 이를 보면 일본 풍습인 망년회가 서울의 권력층과 지식층 사이에 널리 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국립국어원이 발행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도 망년회가 ‘한 해를 보내며 그 해의 온갖 괴로움을 잊자는 뜻으로 베푸는 모임’이라고 올라 있다. 사전적 의미에도 무언가 흥청망청 마시면서 한 해를 잊는다는 의미가 배어 있다. 함께 한 해를 돌아보면서 아쉬움을 나눈다는 것보다는 깡그리 잊어버린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렇게 잊어버리려면 함께 모여 2차, 3차 술을 마시면서 만취 상태로 인사불성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다.
‘송년회’는 차분히 한 해를 돌아보는 자리
우리 조상들은 연말이 되면 누군가에게 진 금전적인 빚은 물론 마음의 빚까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대체적으로 조용히 보내는 편이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연말 풍습으로는 ‘수세(守歲)’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수세’는 그해 섣달 그믐날이면 방·마루·부엌 등 온 집안에 불을 켜놓고 밤새 자지 않고 보내는 것을 가리킨다. 이날 밤을 새우면서 묵은 한 해를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고 한다. 민간에서는 아직까지도 이날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다. ‘수세’는 조용히 한 해를 정리하고 새해를 설계하면서 송구영신(送舊迎新)하는 풍속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망년회’와 달리 우리는 연말 모임을 ‘송년회(送年會)’라 불러 왔다. ‘송년’은 한 해를 보낸다는 의미로,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뜻의 송구영신(送舊迎新)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송년회’는 차분히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를 준비하는 자리라는 의미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한 해를 잊어버린다는 뜻의 ‘망년회’와 확연히 다르다. ‘송년회’의 표준국어대사전 풀이도 ‘연말에 한 해를 보내며 베푸는 모임’이라고 돼 있다.
시대가 바뀌면서 연말 모임 풍습도 바뀌어
시대가 바뀌면서 술자리 문화도 많이 사라졌다. 평소 회식 때는 물론 연말 모임에서도 술이 점차 줄어드는 분위기다. 일반적으로 회식이나 모임이 주로 저녁 시간대에 열렸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모임을 점심시간대로 옮기는 경우도 많아졌다. 최근에는 특히 연극·영화·연주회 등 문화행사나 사회 체험을 하는 연말 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떠들썩하게 보내던 연말 모임이 경건하고 조용하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하는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식품전문업체인 SPC가 이색 송년회를 열어 관심을 끌었다. 며칠 전 서초구 양재동 본사에서 대한적십자사 남부혈액원과 따뜻한 연말을 나누는 ‘헌혈 송년회’를 진행했다. 임직원 헌혈 송년회는 2011년부터 12년째 진행해온 SPC만의 특별한 연말 행사로, 평소 허영인 회장이 강조하고 있는 ‘나눔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됐다고 한다. 이번 헌혈 송년회는 소아암·백혈병 어린이 지원을 위한 ‘헌혈증 모금 캠페인’도 함께 진행했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식의 망년회 문화가 사라지고 우리 전통 본연의 송년회 문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는 ‘망년회’라는 일본식 표현도 우리식의 ‘송년회’라 부르는 것이 좋겠다. ‘망년 모임’ ‘망년 술자리’ ‘망년 등반’ ‘망년 여행’ 등도 ‘송년 모임’ ‘송년 술자리’ ‘송년 등반’ ‘송년 여행’으로 바꿔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망년회’는 ‘망’자가 ‘망할 망(亡)’자 같아서 어감도 영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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