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2.12.05 16:45 수정일 : 2022.12.05 16:47
작성자 : 조홍식
과거 강화에서 의병 활동 등으로 많은 애국지사가 순국하거나 투옥되었으나 이에 대한 사료 발굴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때문에 아직도 많은 강화 의병들의 공적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잠들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을 타파하고자 강화군(군수 유천호)은 지난해 11월 4일 인천대학교(이사장 최용규)와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이태룡)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강화군 독립유공자 발굴과 포상신청’에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그 결과 강화군과 인천대학교 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일제침략기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유공자 30명을 추가 발굴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강화군은 현재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 30명에 대해 국가보훈처에 국가유공자로 등록 및 포상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본지는 강화 의병의 업적을 기리고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 의병 열전’ 시리즈를 연재하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강화군에서 추가 발굴한 미포상 독립유공자인 이병호 의병장과 여만복·남궁경찬·남궁문경 의병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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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의병장 본적 : 미상 이병호(李秉浩) 의병장은 1907년 광무황제가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당하자 의병을 일으켜서 30~200여 명의 의진을 이끌고 황해도 해안과 경기도 도서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0월 황해관찰사 조희문의 보고서에 김봉기(金鳳基)·이근수(李根秀) 등과 더불어 18명의 주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고 하였고,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황해도 강령군과 해주군 연평도 등지에서 많은 해산군인으로 구성된 의진을 이끌고 용감하게 싸웠다고 기록하였으며, 특히 그의 의진에서 활약하다 피체되어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된 차복만(車福萬)의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경기도 교동(현 강화군 속면)에서 맹활약한 것으로 드러나지만 판결문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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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만복 의병 본적 : 미상 강화 출신인 여만복(呂萬卜) 의병은 이능권(李能權) 의병장이 1907년 4월 헤이그특사 이준(李儁) 일행을 블라디보스코트까지 호종(護從)하고 돌아온 후 이준 열사가 자결하고, 광무황제가 퇴위되었다는 소식에 300명에 이르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을 조직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할 때 김추옥(金秋玉)·유성준(兪成俊)·이호춘(李浩春) 등과 더불어 핵심 참모로 참여하였다. 그는 대동창의단 참모로서 강화군 길상면, 상도면 등지에서 총기 구입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였고, 1908년 음력 11월 1일 전등사(傳燈寺)에 묻어둔 총기 2정을 주지 송계찬(宋戒燦)이 일본군에 넘긴 죄를 물어 수장하는 등의 일을 하다 피체, 원심 재판의 피고인으로 나오지만 판결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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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경찬·남궁문경 의병 본적 : 미상 남궁경찬(南宮敬鑽)·남궁문경(南宮文景) 의병은 강화 출신으로 이능권(李能權) 강화 의병장의 생질(甥姪)이다. 이능권(李能權) 의병장은 1907년 4월 헤이그특사 이준(李儁) 일행을 블라디보스코트까지 호종(護從)하고 돌아온 후 이준 열사가 자결하고, 광무황제가 퇴위되었다는 소식에 300명에 이르는 ‘대동창의진(大東倡義陣)’을 조직하여 의병투쟁을 전개했는데, 남궁경찬(南宮敬鑽)·남궁문경(南宮文景) 의병도 이능권의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이능권 의병장은 총기 구입을 위해 강화군 길상면, 상도면 등지에서 모금 활동을 벌였고, 모금된 군자금으로 총기 구매를 위해 나섰다가 1908년 12월 14일 피체되었는데, 남궁경찬(南宮敬鑽)·남궁문경(南宮文景) 의병은 이에 앞선 12월 10일 이호춘(李浩春), 김원식(金元植) 의병 등과 함께 인천경찰서 순사대에 피체되었다. 그러나 현재 판결문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광무황제 : 고종을 ‘연호+(황)제’의 호칭으로 부를 경우 ‘광무황제(光武皇帝)’ 혹은 ‘광무제(光武帝)’가 된다. |
조홍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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